|조주석의 북카페|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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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석의 북카페

사도신경, 송영으로서 신앙고백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강영안 지음|IVP|293쪽|2007년

서평_조주석 목사|합신 출판부 실장

군복무 시절에 각인된 한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이 책의 지은이가 사병 식당에서 아
침 식사 때 칸트의 ‘프롤레고메나’를 독일어 원서로 읽고 있던 모습이었다. 대학에
서 철학을 공부한 나였지만 그 책을 번역서로도 읽어보지 못한 내가 아니었던가. 그는 
얼마 있다 제대했고 계속 철학을 공부하여 대학 교수로 재직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
다. 

감동 없이 암송하는 사도신경

이참에 그가 사도신경 첫 문장을 강의하여 책으로 펴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니”라는 고백을 강의한 것이다. 이 한글 고백은 라틴어 
원문의 단어 배열과 달라, 지은이는 이렇게 옮긴다. “아버지이시고, 전능자이시고, 천
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나는 믿습니다.” 어느 번역을 취해도 내용에는 빠진 것이 
없지만 후자의 번역이 원문의 순서와 더 가깝다. 이 첫 문장은 하나님을 아버지, 전능
자, 천지의 창조주라는 세 요소로 신앙을 서술한다.
지은이의 접근 방식은 아주 실제적이다.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큰 문제들을 꺼내어 공
론화하는 식이다. 원래의 취지가 망각되고 있는 사도신경의 문제(제1강), 팽배한 무신
론의 문제(제2강), 여성 신학자들이 제기하는 하나님의 호칭 문제(제3강), 전능한 하나
님이 허용하시는 고통의 문제(제4강), 기독교 안에서 창조와 진화를 이해하는 문제(제5
강) 들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때 상대의 견해를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에서 인격적 학문적 성숙성이 엿보인다.
눈에 띄는 몇 가지를 들여다보자.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는 자들이 있다.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이 그렇고, 길선주 목사도 그
랬으며, 아버지의 폭력과 박해 경험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 어려워하는 사람
들도 있다. 이 모두 하나님의 호칭 문제와 관련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나 여성적 이미지로 
그리는 구절들도 있다. 더 나아
가 칼빈 선생이 이사야 46:3을 주해하면서 교회사 전통에서 매우 드물게 하나님을 ‘아
버지와 어머니’라고 말한 것조차 감추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 불러야 할 이유는 서술어로 사용된 비유적 용어가 호칭으로는 결코 사용될 수 없다
는 주장이다. 예컨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요새라 고백했다고 해서 서술어에 해당하
는 반석이나 요새를 호칭으로 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껄끄러운 문제도 다룬다. 창조와 진화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 안에
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이 세 견해 모두 하나님의 창조는 
인정하지만 현대의 과학적 지식을 얼마만큼 수용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그 경계는 갈
린다. 철학 교수이자 고신측 장로로서 지은이는 과학적 지식을 상당 부분 수용하는 입
장이다. 흔히 ‘진화론적 유신론’이라 비판받는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태도가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앙이 대다수인 한국교회 풍토에서는 대단히 
도발적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재빨리 그를 재단하려 들지 말고, 천동설로 지동설을 억
압하고 단죄했던 
중세 교회의 실패를 한번쯤 떠올려 본다면 그의 논의는 신중히 검토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일 예배 때마다 나는 사도신경을 공적으로 고백한다. 이제 그것은 너무 익어 단순한 
암송에 가까운 때가 더 많다. 이 느슨한 나의 태도를 본서는 처음부터 여지없이 두들
겨 팼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
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사랑의 고백이요, 찬양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말입
니다.” 이 대목에서 지은이의 주장에 크게 공감했을 뿐 아니라 해이해진 내 영혼을 다
시 추스르기도 했다. 나만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독자라도 분명 그렇게 할 것이다.

당당한 만큼 실려도 갖춰야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이요 송영이라고 주장하고서도 이 기조
를 일관되게 유지한 것 같지는 않다. 많은 지면을 변증하는 데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
다. 왜 그랬을까. 변증의 목적은 우리의 고백을 합리적으로 설명해내어 믿음을 더 공고
히 하려는 데 있지만, 송영이란 예배에 속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변증을 통해 우리가 
송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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