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하심에 풍성하게 젖어들라_변세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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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하심에 풍성하게 젖어들라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얼른 보상이나 업적을 받으려 하면 이처럼 치사한 인생도 없을 것

 

꽃은 피고 지기 마련이다. 일찍 봄의 전령사 역할을 했던 봄꽃들이 그 자태를 감춘다. 다른 꽃에 비해 서둘러 나오느라 마치 옷을 입고 나오지 않은 것 같다. 대체로 봄꽃들이 성격이 조급하다. 열매가 없으니 말이다.

이것은 비단 꽃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도 일찍 출세를 하면 나중에 가서는 명예로운 결실을 거두기가 어렵다. 연예인들도 일찍 유명해지면 그 인기가 오래가지를 못한다. 3전 4기, 7전 8기, 134전 135기가 아름답고 나중에 보면 그 모습이 진지하고 세상을 많이 안다. 

데이비드 부룩스의 [인간의 품격]에서도 삶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이야기를 기술한다. 저자는 인간을 ‘뒤틀린 목재’로 보면서 누구나 결함을 지닌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란, 결함 있는 내면의 자아가 끊임없이 투쟁하며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겸손과 절제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외적 성공이 아니라 내적성숙에 둔다. 겸손을 망가진 자신의 모습을 날마다 되돌아보는 것에서 찾는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절대주권 신학과 개혁교회를 지향하는 우리는 개인의 삶이나 목회현장에서 대단한 결과들을 보고 싶어 한다. 여기에는 상대방을 빨리 설득하고 굴복시키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다 받아내시고 다 품에 안고 가시는 그 자체를 중요시 여기셨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설교로도 대단한 것을 할 수 없다. 한 교회에서 20년 동안이나 서로 만나고 보는 교우들에게 잘난 척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새로운 목회계발서를 만들 수도 없다. 그나마 조금 더 나은 인격으로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안고 갈 수 밖에 없다. 목사를 소품으로 써서 신자가 크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땅 끝인 것이다. 우는 자리, 할 말 없는 자리, 억울한 자리, 견딜 수 없는 자리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셨다. 우리가 사는 신앙여정의 길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음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당장은 거창한 일을 못해도 하나님이 우리와 묶어주신 이웃들 앞에서 우리는 그들을 외면하지 말고 끝까지 편들어주고 같이 울고 같이 웃어야 한다. 비록 그들을 도와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박영선 목사는 “우리같이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위해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 인생의 매순간은 은혜를 드러내시기 위해 하나님이 당신의 성의로 마련하신 소품이요, 섬세하게 준비하신 장치이다. 인생의 모든 막막한 자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곁으로 미는 자리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신앙과정이 누적되어 충만해진 인생일 뿐이다. 토마스 포스터는 “문학과 독서의 효과는 발전적이지 않다. 그것은 누적적이다”라는 것이다. 신앙으로 말하면, 충만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은 결과나 업적 싸움이 아니라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난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의심, 불안, 시험, 고통 속에서 살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견디어 내는 것이 위대한 신앙이다. 얼른 성장하고 보상이나 업적을 받으려고 하면 이것처럼 치사한 인생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았는가가 중요하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마귀의 유혹을 조심해야 한다. 인생을 사는 것이나 목회현장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많은 시간이 흐르다보니 누군가에게 할 말도 없다. 모두가 다 다르고 이중적이고 자기입장에서 후퇴할 마음도 없기 때문에 공연한 말을 해도 헛된 것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아침, 저녁으로 다르다. 나조차도 변덕스러운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사소한 것 밖에는 선택할게 없다. 그 선택된 것마저도 어떻게 견디어내며, 고쳐내며, 추스르는가가 있을 뿐이다. 목회가 참고 웃어주는 것 밖에는 달리 할 것이 없다.

심지어 우리가 따르는 개혁주의라고 해서 모든 것을 대변하지도 않는다. 하나의 기둥으로 다른 기둥을 이해해야 할 뿐이다. 다섯 개 중에 우리 것이 하나 일 뿐이다. 이 다섯 개 중에 우리가 조금 나을 뿐이다. 앞서서 가장 잘 붙드는 기둥일 뿐이다. 기둥만 다섯 개 있으면 안 되니까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신학을 가졌다는 것이다.

누구를 포용한다는 것도 무조건 합치자, 만나자가 아니라 우리 자리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지난 2천년 동안 교리적으로만 일하신 것이 아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잘 모른다. 인간은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폭이 넓어야지 자기 자신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를 이해도 하지도 못할뿐더러 하나님도 제한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고 있다. 놀라운 약속이다. 기어코 모든 것을 유익되게 해주겠다고 한다. 그러니 성공이 아닌 성장의 모든 과정에서, 인간의 약점과 한계의 현실이 가지는 진실에서, 목회현장에서, 같은 처지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풍성히 젖어들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주신 사명의 길을 길게 보면서 단단하게 걸어가야 한다. 때로는 안 되는 것 같은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