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삼일이 좋다’ _이은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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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심삼일이 좋다’

< 이은상 목사, 동락교회 >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 지키는 것 방해 된다면 목표부터 고쳐야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용어는 ‘굳게 먹은 마음이 사흘을 못 간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한 번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로 작심하였으면 초지일관, 와신상담하는 의지로 끝까지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가서 성공을 거두는 것이 인간으로서 옳고 떳떳하다는 교훈으로 쓰인다.

가령 신년 초 성경읽기, 매일 큐티, 다이어트, 새벽기도, 절대주일사수, 예배횟수 한 번 더 늘리기 등을 결심했다면 뜻을 굽히지 말고 계속 해야 한다는 말이다. 혹자는 작심삼일도 열 번하면 삼십 일이 된다하여 자주하라고 하지만 보통 이 용어는 긍정보다 부정의 의미로 쓰인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 이 용어가 긍정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작심삼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계획하고 결심한 것을 삼일이 못되어 바꾸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는 말이다. 그 실례를 보여준 인물이 바로 다니엘이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유다백성들 대부분은 갈대아인의 노예로 일을 해야 했지만(대하 36:20) 함께 포로 된 다니엘은 바벨론 교육 3년 후 왕궁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단 1:5). 따라서 당시 다니엘의 목표는 바벨론교육 3년 과정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의 목표에 갑자기 비상등이 켜졌다.

바벨론교육 졸업을 위해서는 갈대아왕이 정해준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그 음식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거부해야 할 음식이었다(고전 10:19-22). 다니엘은 고민했을 것이다. 그냥 교육목표를 초지일관 밀고나갈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다니엘은 뜻을 정하였다(단 1:8). 바벨론교육 목표를 쉽게 포기했다는 말이다(실제로 어려운 일이지만, 대하 36:17-21). 다니엘의 목표는 작심삼일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빛나는 졸업장을 타게 되었고 70년간의 명예를 누리게 되었다. 이처럼 작심삼일이 항상 나쁜 것도 아니고 초지일관이 늘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그 방향과 목표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이해의 도움을 위해 ‘목표’와 ‘목적’이라는 용어를 비교하여 살펴보자. 목표는 비교적 단기간 내에 도달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표적, 목적은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도달하려는 방향과 궁극적 목표, 또한 목적은 본질적이며 존재적인 고집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신자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인데 비하여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은 목적은 될 수 없고 목표인 것이다(고전 10:31, 소요리문답 1). 목적과 목표 둘 다 신중성을 가지지만 목표는 때로는 목적을 위하여 바꿀 필요가 있다. 하지만 목표 때문에 목적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신자로서의 목적을 지키기 위하여 교육 완성이라는 목표를 포기할 줄 알았던 것이다. 이처럼 신자는 자아실현이나 성공을 위한 프로젝트가 하나님의 영광에 걸림돌이라면 그 뜻을 속히 포기하거나 수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목적과 목표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는 인생들이 있다. 다니엘의 왕궁교육을 담당하던 환관장 아스부나스와 같은 자들이다(단 1:3). 환관은 내시 같은 직업을 말하는데, 나면서부터 혹은 사고로 인하여 고자된 자들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왕궁에서의 향락과 득세를 위하여 혹은 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고자된 자들도 있다.

이들은 성공이라는 목표 때문에 인간존재로서의 본질인 성정체성을 바꾼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중국 명나라 때 경제적 어려운 시기에 3천명 내시 모집에 2만 명이 몰려왔다고 한다.

지금은 경제적 혼란의 시기라 한다. 만일 작심하여 ‘그 일’을 하기로 했는데 ‘그 일’이 신자의 목적인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 지키는 것에 방해가 된다면 지금 당장 그 목표를 고치거나 굽혀야 할 것이다.

‘사람이 뜻을 정했으면 끝까지 밀고나가야지 작심삼일하면 되겠는가?’라는 말은 반쪽 지혜인 것이다.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북한의 고집처럼 무지인 것이며, 성 바꾸기를 해서라도 끝까지 오락을 즐기겠다는 자들처럼 죄의 올무에 잡힌 것이다. 

잘못된 목회와 신학은 밀어붙이기보다 작심삼일이 더 좋다. 굽은 소나무가, 굽이도는 실개천이 아름다운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