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교회사 이야기 11] 뉴잉글랜드 청교도 이야기_안상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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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잉글랜드 청교도 이야기

안상혁 교수 (합신 역사신학)

 

예배와 세상에 대한 소명 의식에서 보여준 진지한 태도와 진심 어린 노력

17세기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대서양을 건너갔던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청교도가 아니었습니다. 미국을 청교도에 의해 세워진 나라로 알고 있는 사람은 다소 당황할지 모릅니다.  1630년부터 1660년의 기간 동안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약 21만 4천명입니다. 이주민 가운데 북동부의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이주한 청교도의 숫자는 불과 2만 5천여 명입니다. 두 배에 해당하는 약 5만 명이 남부의 체사피크 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전체 이주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11만 8천명은 서인도제도로 이주했습니다. 체사피크와 서인도제도에 정착한 이들의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신대륙을 찾아 온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담배와 사탕수수 그리고 면화를 재배하는 농장을 운영했습니다. 농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아프리카로부터 흑인노예를 데려와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후일 미국사의 어두운 부분을 차지하게 될 갈등의 씨앗이 뿌려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이 ‘청교도의 나라’라는 말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요?

하버드 대학의 페리 밀러 교수에 따르면 이는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만이 자신들의 소명과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피력한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소수의 청교도는 처음부터 독특했습니다. 떠나온 고향 나라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이상적인 교회와 기독교 사회를 건립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선언했습니다. 대서양을 건너면서 존 윈스롭은 “전 세계의 눈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라고 설교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5장 14-16절에 기록된 말씀에 기초하여 ‘언덕위의 도시’를 건설하는 것을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비전으로 규정했습니다.

뉴잉글랜드로 건너온 청교도는 ‘오직 성경’의 원리에 근거해서 말씀과 기도 중심의 간결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당은 말씀 중심의 예배를 위해 모든 면에서 단순하게 건축되었습니다. 예배당은 직사각형의 단순한 구조였으며 회중과 성직자의 공간을 따로 분리하는 구조물은 처음부터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예배당 안에 각종 형상, 조각상, 성화 등을 두지 않았습니다. 예배당의 벽은 하얀색이었고, 모자이크 장식이 없는 넓은 창문은 실내를 밝게 비추었습니다. 예배 음악도 단순화되었습니다. 화려한 오르간 연주나 성가대는 없었습니다. 그 대신 회중이 다함께 부르는 단조로운 운율의 시편찬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 모든 노력은 ‘말씀 중심의 예배’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연구자는 주일 공예배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1641년 뉴잉글랜드 보스톤의 주일 아침, 주민들은 집회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가족들과 더불어 마을 중앙에 있는 예배당으로 모여듭니다. 예배는 오전 9시에 시작되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강단에 나와 개회기도를 인도합니다. 기도를 마치면 목사나 교사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경의 한 장을 봉독한 후, 회중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을 풀어 설명합니다. 성경주해가 끝나면 치리 장로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와 시편 찬양을 인도합니다. 목사는 강단에 서서 약 한 두 시간 설교를 하고. 설교가 끝나면 회중이 시편찬양을 부릅니다. 이후 목사나 교사가 나와 한 시간 이상  목회 기도를 인도하고 축도함으로 예배를 폐회합니다. 흥미롭게도 당시 뉴잉글랜드 교회의 회중은 이처럼 긴 예배와 설교자의 긴 설교를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회중의 권리로서 당연시 여겼습니다. 뉴잉글랜드의 예배를 연구한 엘리스 얼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초기 교회의 회원들은 이처럼 긴 설교와 예언을 결코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짧은 설교를 신앙 없고 불경건하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이는 마치 자신들이 돈을 지불하고 마땅히 받아야할 정당한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교자들이 직면해야 했던 문제나 반대들을 기록한 성직자와 평신도의 모든 문헌자료와 일기들 안에서 지금까지 나는 지나치게 긴 기도나 설교에 대한 단 한건의 불평이나 비판에 관한 기록도 발견하지 못했다.

말씀에 대한 교인의 적극적인 태도는 공예배가 이루어지는 주일 이전부터 목격되었습니다. 보스톤 교회의 교인들은 매주 목요일에 교회에 와서 존 코튼 목사의 성경강해에 참석했습니다. 다수의 성도는 평균 2-3회 정도 주중에 열린 집회에 참석하여 성경강해나 설교를 들었다고 코튼은 증언합니다. 때로는 이것이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기 때문에 마을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모임 회수와 시간을 제한할 필요성을 논의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토요일 저녁이 되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서의 내용을 가르쳤고, 주일 저녁에는 자녀들에게 그날 설교의 요점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목사들 역시 남다른 열정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교인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대다수의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원고의 도움을 받지 않은 채 긴 시간 동안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1685년 코튼 매더가 보스톤 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할 무렵, 영국에 있는 그의 삼촌 나다나엘 매더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한 가지 너에게 당부할 말을 잊었다. 어떤 경우에라도 원고를 이용하거나 그것의 도움을 받아 설교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뉴잉글랜드에 있을 때 특별한 약점이 있었던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설교원고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내 생각으로 그는 어지럼증이거나 그와 비슷한 종류의 연약함이 있었다. 어째든 네 조부들은 물론 이곳에 있는 네 삼촌이나 나 자신도 비록 설교문을 작성하기는 하지만 설교시간에 원고를 이용하지는 않는단다.”

이처럼 뉴잉글랜드 초기 교회의 목회자와 회중은 성경 말씀에 기초한 예배 공동체의 모습을 세워나가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세인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도 이들의 모습이 유별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세상에 대한 소명 의식에 있어 이들이 보여준 진지한 태도와 진심 어린 노력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