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복음의 총체성과 공공성을 구현하는 개혁교회_황경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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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총체성과 공공성을 구현하는 개혁교회

황경철 목사(국제복음과공공신학연구소장, 동서울노회 전도목사)

 

최근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지용근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3040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언급하며 한국교회의 특징을 세 가지 키워드로 요약하였다. 그것은 “권위적, 비도덕적, 이념적”이라는 것이다. 이 세 단어는 누구를 겨냥한 것일까? 모르긴 해도 필자를 포함한 한국교회 목회자를 향한 젊은 세대의 인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 마음을 두라”(잠 27:23)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 목회자는 성도들의 이러한 평가를 무겁게 듣고, 어떻게 자신의 목회와 설교를 개혁할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공공신학은 복음이 신자의 내면이나 예배당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경적 가치를 드러내는 것을 지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솔선해야 한다. 가령, 소자에 대한 사랑과 약자에 대한 존중을 가르치기 전에 교회 안에서 이러한 가치가 건실하게 구현되고 있는가?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당회 장로와 부교역자의 관계가 세상의 갑질 문화로 얼룩져 있지는 않은가? 종교인 납세나 기부금 영수증 등 재정의 기획, 집행, 결산, 보고가 투명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교회 안에서조차 세상에서처럼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가진 자가 은근히 대접받고 약자가 무시당하는 안타까운 일은 없는가? 세상에서 일어났다면 대서특필될 일이 교회 안에서 은혜와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되는 경우는 없는가? 상식이 통하는 교회란 바로 이런 의미에서 문제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복음의 총체성과 공공성을 구현할 수 있을까? 거창한 담론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제안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첫째, 상대를 돕기 전에 먼저 상대의 필요를 들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필요를 아셨음에도,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으셨다(막 10:36). 때로는 ‘듣기도’ 하시고, 더 깊은 행간의 소리를 듣기 위해 ‘묻기도’ 하셨다(눅 2:46). 교회는 세상을 변혁하기 전에, 상대에게 도움을 주기 전에, 먼저 잠잠하고 겸손하게 들어야 한다. 따뜻한 눈길로 응시하며 듣고, 마음으로 공감하며 들어야 한다. 잘 듣는 것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가 필요하다. 설교자에게 강단에서 ‘공공신학’을 직접 다루는 것은 부담이 되고, 성도들에게도 그것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대신에 십자가 구속을 통해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이야기 안에 성도 개개인의 삶이 담겨 있음을 설교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성도의 일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도록 그들에게 영적 안목과 통합적 인생관을 열어줄 수 있다. 신자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거대한 맥락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명을 깨닫게 된다(고전 10:31). 신자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그의 신앙은 일상적 삶과 괴리된 이원론적 신앙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 나라를 죽은 다음에나 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현실 세계에서는 세상의 쾌락을 좇아간다. 때로는 불신자와 똑같이, 때로는 불신자보다 교묘하고 강렬하게 그것을 추구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 한국교회가 마주한 슬픈 자화상이다. 목회자는 이 점을 고려하여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성’을 설교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통해 성도는 복음이 공적이고, 총체적이고, 우주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곧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모든 영역에서 복음의 풍성함과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도록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사모한다.

셋째, 칭의와 성화를 균형 있게 강조하는 설교가 요구된다. 70년대 한국교회는 전도와 회심을 통해 성장과 부흥을 경험하는 축복을 얻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명암도 공존한다. 교회성장주의가 한국교회를 지배하면서 교세 확장에만 치중한 나머지, 교회의 대사회적 책임과 공적인 역할은 소홀해졌다. 박영선 목사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에는 ‘순교와 부흥’의 신앙만 있었는데, 이제는 ‘고민과 성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회심과 칭의도 중요하지만, 그 후에 주어지는 성화의 여정도 균형 있게 제시되어야 한다. 자칫 칭의만 강조할 때,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한답시고 성화와 선행이 간과되는 방임주의에 빠질 수 있다. 역으로 자기 힘과 공로로 성화를 실천하려 할 때, 율법주의라는 그릇된 성화론에 노출된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의 균형을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제시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한 신자가 그리스도에게 받는 이중은혜(duplex gratia)는 첫째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재판관이 아니라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요, 둘째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화되어 생활의 흠 없음과 순결을 좇는다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예수를 믿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에게 동시에 주어지는 은택이다. 둘은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 없다. 신자가 설교를 통해 칭의와 성화를 균형 있게 배울 때, 그는 교회의 신실한 교인은 물론, 책임 있는 시민으로 사회에서 빛과 소금 구실을 할 것이다(마 5:16). 이러한 성도로 구성된 지역교회는 공공신학적 소양이 깊어지고, 대사회적 신뢰도도 차츰 높아질 것이다. 이것은 다시 복음 전도의 문턱을 낮추어 목회 생태계를 쇄신하는 선순환으로 작용할 것이다(행 2:47).

넷째, 지시하는 설교가 아닌 공감하는 설교를 제안한다. 포스트모던과 다원주의 사회에서 개개인의 고유한 가치와 감정은 극도로 존중받는 것이 시대정신이 되었다. 코로나 이후 “초개인주의화”는 더욱 강화되었고, 사람들은 외롭고, 고독하며, 우울하고, 예민해졌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사회적 우울감 수치는 올라갔고, 우울증 치료환자도 급증하였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설교는 어떻게 전달되어야 할까? 아무리 옳은 내용을 전한다고 할지라도, 그 전달 방식이 지시나 강요라면 청중은 마음을 닫게 될 것이다. 청중에게 무엇을 지시하기에 앞서, 청중의 마음을 살피고 돌보는 공감적 설교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을 꼭 청중의 구미를 맞추는 인본주의적 설교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그들을 배려하고 공감하며 복음을 전달할 수가 있다. 예수님도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공감하고 체휼하시는 분이다(히 4:15). 목회자는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는 성육신적 노력을 설교문 작성뿐 아니라 심방과 회의, 의사결정 전반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목회자가 성도의 시련과 아픔을 공감하는 내용과 방식으로 설교를 전달할 때, 그 설교는 청중의 마음에 닿을 것이다. 설교자의 머리에서 나온 설교는 청중의 머리에만 닿지만, 설교자의 가슴에서 나온 설교는 청중의 가슴에 와닿을 것이다.

목회자의 이러한 수고와 시도들이 복음의 총체성과 공공성을 곧장 구현할 수는 없겠지만, 교회를 만물을 충만케 하는 충만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기대에 합당한 의미 있는 개혁이 될 것이다(엡 1:23). 바빙크가 참으로 옳게 말했듯 교회만이 아니라, 집과 학교, 사회와 국가도 기독교 원리의 통치 아래 놓여 있고, 놓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