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이미지는 실재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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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이미지는 실재에서 나온다

 

   오늘날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image)를 중요시하는 시대이다. 그래서 이미지 관리라는 말도 나왔다. 이미지가 외적인 면모라면 실재(reality)는 그가 가진 본질적, 내적인 면모를 말한다. 좋은 실재에서 비롯된 좋은 이미지야 더할 나위 없지만 이미지와 실재가 항상 일치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 온전치 못하여 진정한 내면을 갖추는 힘이 부족하고 서로의 내면을 제대로 보는 눈도 약하기 때문이다. 좋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다만 좋은 실재를 갖추려 하지 않고 전략적으로 이미지만을 조작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미지와 실재의 가장 쉬운 예가 대중 매체를 통한 제품 광고이다. 어떤 광고라도 제품의 본질적인 기능만을 그대로 선전하진 않는다. 다수의 광고는 실재와는 다른 과장된 설명과 왜곡을 불사하며 판매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이미지 전략인 줄 알면서도 그런 광고에 지배를 받고 그 제품의 본질을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제품에 하자가 보여도 그 정도는 감수할 만큼의 면역력과 적응력을 갖게 된다.

   이런 부분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시뮬라시옹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는 인공적 작업을 뜻한다. 일종의 가상 현실, 혹은 이미지 조작인 셈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미지의 네 가지 면으로 이를 설명한다. 실재를 반영하는 것, 실재를 변질시켜 거짓을 만들어 내는 것, 실재를 은폐하여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 그리고 사실성이 완전히 사라진 왜곡된 이미지가 실재가 돼 버리는 것이다. 이미지 작업이 진행되면 결국 본래의 실재가 무엇이든 나타나는 이미지를 실재라고 믿고 사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한국 교회도 위의 어느 단계에 있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지만 이모저모 시뮬라시옹의 폐해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이미지에 적잖이 힘을 써 온 게 사실이다. 그것이 단기간의 외적 성장의 효과를 가져 온 한 요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외면에 치우친 이미지 전략은 시간이 흐르자 결국 부메랑이 되어 교회에 손상을 입히고 있다. 내면이 준비되지 못한 채 외면에 치중한 결과 이미지마저 흐려지게 된 것이다. 제 아무리 광고를 멋지게 잘해도 결국 그 제품의 질이 함량 미달일 경우엔 때가 되면 집단적인 외면을 받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일찍이 마이클 호튼이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는 책에서 설파한 대로 미국 교회는 사회적 흐름을 타고 실용주의와 소비자중심주의의 길을 걸어왔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 중심의 물량적인 행태를 낳았고 교회가 세속화의 길을 걸으며 쇠퇴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 교회도 그 길을 답습해 온 혐의가 짙다. 우리는 은연중 내면의 본질을 추구하지 않고 외적인 면모에만 가치를 두고 투자하는 사회적 조류에 편승해 온 것이다. 그러다가 실재가 약해지자 조작된 이미지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정체성의 혼란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애초에 우리의 실재를 정직하게 돌아봤어야 했다. 사람들이 끝없이 속아 주진 않는 것이 현실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

  우리가 관심을 두고 진력해야 할 것은 실재를 갖추는 일이다. 본질적 내면을 점검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재건한 다음 이미지에 연연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실재를 갖추면 실재와 일치된 이미지는 자연스레 우러나오기 마련이다. 조작이나 왜곡이 아닌 정당하고 진정한 이미지는 실재에서 나온다.

 잘 알듯이 엑수시아 (έξουσία 권세, 권위)라는 말은 엑크(έκ – 로부터)와 우시아(ουσία 본질, 실재)의 합성어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실재로부터 발현되는 것이 진정한 권위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권위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미거나 과대 선전을 할 필요도 없다. 신앙의 권위자인 척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삶을 꾸짖으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미지와 실재, 겉과 속이 일치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생활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 조작되고 형성된 이미지를 실재처럼 계속 유지하려니 힘들 수밖에 없다. 한국 교회도 그런 이미지 관리의 조바심 때문에 피곤에 내몰린 상태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만시지탄은 있지만 우리를 향한 세상의 부정적인 평판에 너무 좌절하지 말고 이를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부끄러운 민낯으로 당분간 비난을 받더라도 향후 실재를 갖추어 나가면 된다.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내면적 본질을 회복하는 삶, 실재를 중요시하는 삶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 개혁이다. 실재를 변질시켜 거짓을 만들어 내지 말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포장하지도 말자. 완전히 왜곡된 이미지를 실재라고 믿고 사는 가상 현실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실재, 교회의 본질적이고 성경적인 실재를 갖추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