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모리아 산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가?
송영찬 국장 daniel@rpress.or.kr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여호와께 드리기 위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죽이려
한 일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다(창세기 22장).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당시
아브라함의 심경을 설명하기 위해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틋한 부성(父性)
에 호소하는 것을 자주 듣곤 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강 이렇다. 아브라함
이 늙은 나이 99세에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들을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기 위
해 모리아 산에 올라가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 하는 장면은 한 마디로 자기
의 심장을 칼로 찌르는 것처럼 가슴 아픈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
브라함은 아들에 대한 사랑보다는 여호와를 신앙하기 때문에 이삭을 바치기
로 결단을 내렸던 것처럼 우리도 여호와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성경은 이러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당시 사
회에서 부자간의 관계는 인격적 관계라기보다
는 한마디로 소유주와 소유물의
관계에 불과했다. 즉 아버지는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아들을 팔아버리거나 심
지어 죽이는 일 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아들을 죽여 자
기의 신들에게 제물로 드리는 일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다. 당시 문헌이나
역사적 자료를 보면 인신 제사가 세계 곳곳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는 인격과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시기에 절대로 인신 제사를 허
용하시지 않으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
라”(창 22:2)고 하신 말씀은 인신 제사를 드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들 이삭
을 전적으로 여호와께 바치라”는 의미였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당시 사회의
통속적인 개념을 가지고 ‘이삭을 죽여 여호와께 바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
이다. 아브라함은 이처럼 통속적인 개념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는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함으로서 아브라함이 사람의 인격과 생명의 존엄성
을 깊이 깨닫게 하셨던 것이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자식의 인격과 생명
을 자신과 같이 존귀
하게 여길 뿐 아니라 사람의 생명과 생존에 대해선 하나
님 외에 아무도 판단해선 안 된다는 점을 일깨우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인간관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대각성과 같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모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야 할
이유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역사적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계시적 사건을 단순히 인간의 부성을 운운하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
도 여호와께 헌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이것
은 성경에 기록된 계시적 사건을 순전히 자신의 감정이나 통속적 사고 기준으
로 판단해버리는 것으로 매우 오만하고 불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하
나님의 일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처럼 자칫 자
신의 암매한 생각으로 잘못 대처할 수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뜻보다는
자신의 상식이나 이권에 근거한 판단으로 마구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일에 자신의 감정이나 이권에 얽매여 함부로 판단하는 일이 없
도록 암매에 빠져선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