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설교
하나님께 속한 영혼
< 임운택 목사 _ 증경 총회장, 성심교회 원로 >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에스겔 18:4)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중 사람을 ‘만물지영장(萬物之靈長)’이라 했으며 예수님은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사람은 영혼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토끼는 토끼처럼, 사자는 사자처럼, 원숭이는 원숭이처럼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특별하게 하나님처럼 지으셨습니다. 사람을 사람처럼 지으셨다면 사람도 일반 동물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니라.”(창 1:27)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사람에게 영혼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피조물 중에 사람만이 영혼이 있습니다. 천사조차 영혼은 없지만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6~18) 여기서 속사람이나 보이지 않는 영혼은 영원하나, 보이는 겉 사람은 잠깐이고 낡아질 것들입니다. 밤과 밤송이, 땅콩과 땅콩 껍질, 쌀과 벼, 이 모두는 보이지 않는 알맹이가 본질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무시하고 보이는 껍질 중심으로 농사하면 어리석고 실패 할 수밖에 없듯이 영혼의 농사꾼인 신앙인이 영혼을 바로 알지 못하면 영혼 농사에 실패하고 어리석은 자가 될 것입니다.
속사람이나 보이지 않는 영혼은 영원합니다. 이 영혼 때문에 겉사람도 달라집니다. 겉사람을 그대로 보면 세상에서 잠깐 삽니다. 그 모습은 점점 낡아져 갑니다. 그리고 이 후에는 죽어 지하에 묻힙니다. 그렇지만 새로 난 영혼과 함께 사는 육신은 세상에 사는 동안 기쁨이 있고 새로워지는 변화가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육신은 다시 영혼과 만나 썩지 않는 몸으로, 영광스러운 몸으로, 강한 몸으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새로 난 영혼과 함께 사는 육신은 복된 육신입니다.
바울 사도는 영혼을 보배로 육체는 질그릇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후 4:7). 교계에서 존경받던 목사님의 하관 예배에서 설교하는 목사님이 “지금 우리는 존경하는 목사님의 영혼을 담았던 질그릇을 땅으로 모십니다.”라고 했는데 참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은 보배 중 보배이고 육은 한낱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다만 보배로운 영혼을 담았던 그릇이기에 소중히 모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영혼’이란 단어가 네 번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영혼, 아버지의 영혼, 아들의 영혼, 범죄 하는 영혼”. 이렇게 한 구절에서 ‘영혼’을 네 번이나 말씀하신 것은 성경에서 여기뿐입니다. ‘영혼’이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184번이 기록되었고 비슷한 단어는 700~800번 기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영혼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실까요? 영혼에는 여러 특성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 영혼은 창조되었습니다
영혼 유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모의 분신이므로 우리의 주인은 부모 즉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영혼마다 하나님이 창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내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 영혼은 영원합니다
세상 만물은 처음과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처음은 있으나 끝이 없고 영원합니다. 삼위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천국이 영원하고, 그리고 우리 영혼이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을 사모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
오늘 본문에서는 범죄한 영혼이 죽는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일반 동물이 죽어 소멸되는 것과 같은 죽음이 아닙니다. 영혼은 총으로나 핵폭탄이나 심지어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도 죽지 않습니다.
영혼은 오직 죄로만 죽습니다. 성경에서 죽음이란 분리됨을 의미합니다. 죽음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적인 죽음으로 영과 육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영적인 죽음으로 사람의 영혼과 하나님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영원한 죽음으로 하나님과 영과 육이 영원히 분리되어 지옥에 떨어지는 불신자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영혼이 죽는다는 말씀은 하나님과 영혼이 분리됨을 말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스위치를 내리면 전원이 꺼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럴 때 시골 할머니들은 불이 죽었다고 합니다. 불이 죽은 것이 아니고 전원에서 단절된 것이죠.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로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절된 영혼은 어떤 방법으로도 연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전하신 지혜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인성으로는 내 영혼을 붙드시고 신성으로는 하나님을 붙잡아 완전하게 연합하게 된 것입니다.(兩性一位: 神性+人性=仲保).
- 영혼은 동등합니다
왕의 영혼은 귀하고 신하의 영혼은 천하거나 백인의 영혼은 귀하고 흑인의 영혼은 천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모든 영혼은 동등하게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사회에서 사람을 차별하는 행위는 비성경적이며(약 2:1-4)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우리도 한 영혼을 빈부귀천(貧富貴賤)에 관계없이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 영혼은 좌소(座所)가 있습니다
영혼은 좌소가 있습니다. 영혼은 몸 안에 있는데 죽은 후에는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천국을 누리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불꽃 가운데서 영원히 괴로워합니다(눅 16:23-24).
그러므로 다윗 왕도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시 31:5)라고 말했고 예수님께서도 “큰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라고 했습니다. 스데반도 부르짖어 가로되 “주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고 했고 베드로 사도는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벧전 4:19)라고 했습니다.
주님께 부탁하지 못한 영혼은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니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계 19:20, 20:10,15)고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불신자들이 조상 숭배라는 명분으로 하고 있는 제사 행위는 영혼의 특성을 알지 못한 행위입니다. 몸을 떠난 영혼이 죽으면 귀신이 되어 후손을 위하거나 해친다는 생각과 제삿날 운감(殞感)하러 온다고 생각하여 초혼(招魂)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큰 죄입니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납골당과 황금보석으로 치장한 유골함을 사용하는 행위 또한 영혼의 특성을 알지 못한 처사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 영혼은 형상이 있습니다
영혼도 형상 즉 영체가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화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마17:1-8)이라고 하셨습니다. 약 1450년 전의 인물인 모세와 약 850년 전의 인물인 엘리야를 베드로는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황홀한 영체를 알아보고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주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라고 했습니다.
이븐 알렉산더는 하바드대학교 의과대학의 권위 있는 뇌 전문가로서 영혼과 사후 세계를 비웃던 무신론 교수였지만 뇌막염이란 희귀병으로 7일간 뇌사 상태에서 임사체험(臨死體驗)을 한 후 사후 세계와 영체의 황홀함에 대한 책을 집필했습니다.
약 40년 전에 미국의 한 시골 마을로 의사가 왕진을 가는 길에 어린 소년이 손을 들어 차를 세워 조수석에 태웠습니다. 언어 장애 소년인지 말을 못한 채 손짓으로 빨리 가자고 재촉합니다. 가는 중 산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손짓으로 멈추라고 합니다. 또 손짓으로 밑을 보라고 합니다. 낭떠러지에 스쿨버스가 전복 되어 많은 학생들이 사고를 당해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여러 시간 수습 후 버스 밑에 깔려 죽어 있는 한 소년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조수석에 타서 안내하던 바로 그 소년이었습니다.
너무 기이한 사건이기에 방송국에서 의사, 과학자, 신학자 이렇게 세 명의 박사를 초대하여 사고를 재현한 후에 사회자가 묻습니다. “의사 선생님 의학적으로 설명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죽은 아이가 안내를 합니까?” 의사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과학자 역시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신학자가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약 1450년 전에 죽은 모세와 약 850년 전에 죽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토론이 끝난 후 사회자가 시청자 중에 비슷한 체험을 하신 분들은 방송국으로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일주일 만에 8천여 명이 접수했습니다.(갈보리교회 이필재 목사 설교 노트를 참고함)
임사체험을 한 사람은 미국에만도 약 800만 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하나같이 사후 세계와 영체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간증들을 합니다. 이와 같이 영혼에는 형상이 있습니다.
- 영혼은 차등이 있습니다
같은 청년이라도 박지성 청년이나 김연아 청년은 일반 청년과 비교가 안될 만큼 연금이 높습니다. 다른 청년들이 쉬는 시간에 두 청년은 쉬지 않고 엉덩방아를 찧어가면서 맹연습을 하여 기능을 몸에 입혔습니다. 그래서 일반 청년들과 차등이 나듯이 구원받은 영혼이 말씀대로 순종하여 주님의 형상을 덧입어 간만큼 영혼의 가치가 다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구원받은 강도의 영체와 바울 사도의 영체가 차등이 있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맞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사는 성도의 유일한 존재 목적은 주님의 형상 즉 주님의 성품을 입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갈4:19)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신앙생활은 주님의 형상을 입는 일에 집중함이 성도와 교회 본분이며 주님의 소원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번영 위주의 신앙생활은 자타(自他)를 속이는 것으로 영혼 농사를 실패하게 합니다. 한 목회자의 모임에서 특강을 맡은 신학 교수가 강론 중에 세계적인 학자의 글을 소개하면서 “번영 신학은 참된 복을 가리고 자기의 믿음 성장과 교회 부흥을 가로 막는다.”고 발언하여 회중을 감동케 했습니다.
성경은 심는 대로 거두는 농사꾼의 비유로 말씀하였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롬8:5-8).
신앙인은 영혼의 농사꾼입니다. 세상에는 농사의 종류가 매우 많지만 영혼 농사와 육신의 농사로 양분할 수 있습니다. 믿음 농사 외에는 모두 육신의 농사입니다. 사업, 정치, 가정, 직장, 학업. 신앙인이 육신 농사 위주로 살면 영원한 실패자가 됩니다. 영혼 농사 실패한 자가 육신의 농사 성공하고 또 하고 또 해도 성공같은 영원한 실패자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의 1대 지도자 김 씨는 아버지가 김 장로였고 어머니가 강 권사였고 외삼촌이 강 목사였습니다. 그는 좋은 믿음의 가문에서 신앙생활 훈련 받다가 어느 시점에서 영혼 농사를 시시하게 여겨 포기하고 육의 농사에 진력하여 육의 농사 성공하고 또 했습니다. 전 세계인이 부러워 할 만큼 권세 물질 명예에 대성공하였으나 사후에는 영원한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 다음으로 영혼 농사 성공자입니다. 육의 농사는 건강도 없고 가정도 없고 자녀도 없고 실패하고 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영혼 농사는 대 성공하여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육의 농사는 실패하여 그 지방에서 불신자들이 예수 믿다가 삼부자 총살당해 망했다고 불쌍히 여겼으나 영혼 농사는 영원한 성공자입니다.
우리 함께 심비에 새겨 봅시다. “영혼 농사 실패한 자가 육의 농사 성공하고 또 하고 아무리 성공해도 성공 같은 영원한 실패자요, 영혼 농사 성공한 자는 육의 농사 실패하고 또 하고 아무리 실패해도 실패같은 영원한 성공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다 같이 영혼 농사 성공하여 주께 영광 돌리는 지혜로운 농사꾼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