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3주년 기념 특별기고|
독일 교회에서 배울 통일의 길
< 최현범 목사_부산중앙교회/부산 기윤실 공동 대표>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나타난 독일 교회의 큰 역할을 한국 교회는 여러모로 배워야 한다
바르멘 선언은 교회와 국가의 역할과 한계를 분명히 하면서도 교회의 건강한 정치적 책임을 제시했다
서독 교회는 동독 교회와 성경과 예전의 일치 등 비정치적 분야의 연합으로 동질성 유지에 힘썼다
한국 교회는 특정 정치 이념, 체제에 안 갇히고 모든 걸 상대화할 수 있어 통일의 가교가 될 수 있다
독일은 분명 우리와는 다른 나라이다. 역사도 다르고 지정학적인 상황도 다르고 분단의 동기나 과정도 다르다. 그러므로 독일 통일이 우리에게 교본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독일의 통일을 연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구상에서 우리와 같이 한 민족이 외세와 이념으로 인해 분단되었다가 먼저 통일을 이룬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염돈재 교수가 “독일과 한반도가 통일 여건상으로 많은 차이점이 있으나, 통일의 성과나 편익 측면에서 볼 때 독일 통일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가장 적합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한 말은 일리가 있다. 독일 통일은 우리에게 교과서는 될 수 없지만, 중요한 참고서가 될 수 있다. 여러 참고서 중의 하나가 아니다. 다른 참고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참고서이다. 그러므로 먼저 통일의 과제를 앞둔 우리들은 독일 통일의 과정을 연구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의 통일에 대한 오해가 있다. 마치 거저 온 것처럼 생각한다.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동독 정권이 와해되고 그래서 서독에 자연스럽게 흡수된 것이다.’라고 마치 서독이 앉아서 굴러들어온 떡을 먹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독일 통일을 단순화시켜서 나이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통일에 대해서도 동일한 환상을 갖게 된다. ‘머잖아 북한 정권이 무너질 것이고, 그러면 자연히 우리나라가 흡수하여 통일을 이룰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통일 강국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독일 통일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동독이 붕괴해서 자연스럽게 서독으로 흡수된 것도 아니다. 통일을 위해서 오랜 세월 꾸준히 인내하며 노력하더니, 마침내 때가 왔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 준비가 바탕이 되어 있었기에 독일은 통일 이후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다양한 통일의 후유증들을 잘 극복하고 마침내 안정된 강대국으로 유럽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남북 통일에는 독일 통일보다도 더더욱 어렵고도 복잡한 길이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이브한 생각과 언행을 버리고 통일에 대해서 진지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다른 무엇보다도 독일 통일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독일 교회는 통일 과정에서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서로간의 상황이 다르기에 독일교회가 한 일을 우리가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동일한 분단 상황에서 그들이 지향했던 것, 그들의 자리매김, 그들의 노력과 헌신 속에는 우리가 배우고 숙고할 점이 많을 것이다.
독일 교회는 1,2차 세계 대전의 과정에서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 황제 빌헬름 2세가 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려 했을 때에 독일 최고의 지성인 93명이 그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중에는 하르낙을 비롯해서 당대 신학계와 교계의 지도자들이 대거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이 전쟁이 기독교 문명의 방어에 필요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했다. 그리고 패전했지만, 독일 교회는 전쟁에 담긴 탐욕과 파괴성을 심각하게 깨닫지 못했다. 권위주의에 익숙했던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표방한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도리어 루터 르네상스를 일으키면서 민족주의를 북돋우는데 앞장섰다. 그런 가운데 1933년 우익 수구 정당인 나치당의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반자유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표방할 때에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그들은 독일 그리스도인(Deutsche Christen)이라는 교단을 만들어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과 전쟁 정책의 후견인이 되었다.
이에 반대하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백교회를 세워 히틀러에 대항했고, 1934년 부퍼탈의 바르멘 교회에 모여 국가와 교회의 복음적인 관계를 정립한 바르멘 선언을 선포했다. 모두 6개항으로 된 이 바르멘 선언은 교회와 국가의 구별된 역할과 한계를 분명히 함으로 교회의 무분별한 정치화를 경고하고 있다. 아울러 국가 역시 주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정치적 무관심과 무책임을 비판하고, 교회의 건강한 정치적인 책임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나치 시대에 박해를 받았던 이 바르멘 선언은 2차 대전 이후 독일 교회가 지향하는 기독교 사회 윤리의 근간이 되었다.
독일 교회는 이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거치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아울러 평화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뼛속 깊이 깨달았다. 이후 평화는 독일 교회가 나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방향키가 되었다. 자녀들에게 평화를 교육하고 교인들에게 평화를 설교하며 아울러 국가에 평화를 지향하는 정책을 요구했다. 독일 교회는 동독과 동유럽을 대하는 데에서 이런 평화주의적 태도를 단호하게 견지했고, 그것이 독일 통일에 큰 밑거름이 된 것이다. 큰 대전이 끝난 후 평화가 올 줄 알았건만 유럽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눠지고 대치하면서 또 다시 전쟁의 위기 가운데 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동서유럽 대립의 최전선이 바로 분단 독일이었고, 1961년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아이콘이 되어 버렸다.
이런 가운데 평화를 앞세웠던 독일 교회는,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의 일방적인 냉전 논리에 동조하지 않았다. 물론 냉전 논리에 충실한 보수적인 루터주의자들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다수의 목회자들이 바르멘 선언의 노선을 지향하여 동서 화해와 이념 갈등의 극복을 위해 힘썼다. 동서독 양쪽 교회들은 분단에도 불구하고 1945~69년까지 독일개신교교회협의회(EKD)라는 하나의 조직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 간에 많은 만남과 교류를 추진하였고, 이들이 하나됨을 유지하려고 하는 노력은 자연스레 통일을 갈망하게 했다. 이러한 독일 교회의 움직임을 경계하면서 동독 정권은 1969년 동독 교회를 EKD와 분리시켜 동독개신교연맹(BEK)으로 묶으면서 서독 교회와의 교류를 단절시켰다. 아울러 동독 내에서 기독교인들은 공산당원이 되지 못하게 하는 등 무언의 압력을 통해서 교회를 고사(枯死)시키는 정책을 펼쳐갔다. 수많은 교인들이 이탈하는 가운데 동독 교회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쳐야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독의 교회들은 자신들을 사회주의와 공존과 비판을 겸하여 갖는 소위 ‘사회주의 안에 있는 교회’로 칭하면서 조심스럽게 자리매김을 했다.
이때 서독의 교회의 반응이 매우 중요했다. 얼마든지 색깔론을 뒤집어씌워 동독 교회를 빨갱이 교회로 매도하면서 교류를 단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냉전 시대에는 그렇게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오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독 교회는 동독 교회의 처사를 비난하거나 매도하기 보다는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 그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특수한 현실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서로의 관계를 ‘특수한 공동체’(Die besondere Gemeinschaft)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주어진 상황에서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했다. 이것은 서독 교회가 자신을 ‘자본주의 안에 있는 교회’로 생각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사회 체계를 절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모든 정치 이념을 뛰어넘어 서 있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했었던 것이다.
서독 교회는 이처럼 주어진 상황에서 우선 동독 교회와 성경과 예전의 일치를 추구하는 등 비정치적인 분야에서의 연합을 통해 한 교회로의 동질성을 유지해 가려고 힘썼다. 아울러 성경적 가치를 앞세워 평화 운동을 전개하면서 여기에 동독의 동참을 유도했다. 서독 교회는 1958년 EKD 총회에서 핵무장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고, 1970년대를 지나면서 철저한 반전, 반핵의 입장을 취함으로 핵 평화주의를 그리스도인의 평화 사역으로 받아들였다. 바르사뱌 조약국들이 소련의 핵미사일로 무장한 것을 대비하여 1979년에 미국이 퍼싱II 중거리 미사일을 독일에 배치하려고 하자, 독일 교회는 이러한 핵무기 배치에 단호히 반대하면서 평화 운동을 벌렸다. 이때 동독의 교회들 역시 동독 내의 핵무기 배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면서 반핵 평화 운동에 동참하였다. 또한 실질적으로 서독 교회들은 동독 교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동독 목회자들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비를 지원하였다. 대략 3개의 서독 교회가 한 개의 동독 교회를 책임지도록 했다. 그래서 교회를 박해하면서 문 닫기를 바랐던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 동독 교회가 그 명맥을 유지하도록 도와주었다.
이러한 서독개신교회의 평화를 위한 노력은 시간이 가면서 서독과 동독 양정권의 신뢰를 얻어 갔다. 그러는 가운데 서독 정권이 동독 주민의 인권을 위해 전개한 프라이카우프(Freikauf)의 다리 역할을 요청받게 되었다. 이 프라이카우프는 동독이 자신의 감옥에 수감 중인 반체제 인사 즉 정치범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서독으로 보내는 대신, 서독은 이에 상응하는 돈을 동독에 지불하는 거래였다. 실제로 1962년부터 1988년까지 정치범 3만 3천여 명과 그 가족 25만여 명을 서독으로 데려왔고 이를 위해 서독은 약 1조 8천억 원 상당의 금품을 동독에 지불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동독 정부의 대내외적인 입장을 고려해서 아주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다. 그러므로 양쪽 정부는 이 일을 서독의 개신교회에 부탁했고, 교회가 그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이것은 서독 교회가 그만큼 그 사회 속에서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고,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통일의 가교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동서독 교회가 꾸준히 동역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8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동독 교회들이 동독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목회자들이 인권과 민주를 앞세우면서 반정부 집회와 사회 개혁의 리더가 되었다. 2017년까지 독일 대통령직을 맡았던 가우크(Gauck) 역시 과거 동독의 개신교 목회자이며 인권 운동가였다.
특별히 라이프찌히 니콜라이교회에서 1982년부터 매주 평화를 위한 기도 모임이 열렸다. 당시 이 기도 모임을 주도했고, 2015년 내한했던 보네베르거 목사에 의하면, 1982년에 시작한 월요 기도회에서는 반전 운동을 비롯해 인권, 여성, 환경 문제 등에 대한 기도가 드려졌다. 여기서는 동독 정부의 독재 정치에 반대 목소리를 내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토론회를 진행하는 등 교회의 사회적 참여와 책임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보네베르거 목사는 힘주어 말했다. “성니콜라이교회 월요 기도회에서는 기도만 드려진 것이 아닙니다. 국민들은 ‘교회’라는 지붕 아래서 동독 독재 정치에 항거하는 목소리를 냈고, 정치적 이슈를 놓고 토론회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니콜라이교회는 동독의 민주주의를 키워 가는 중요한 모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교회에서의 집회는 1989년부터는 무언의 촛불시위로 발전해 갔는데, 그 수가 점차로 늘더니 마침내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 결과는 당시 동독 수상인 호네커의 실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국 다양한 대내외의 요인이 있었지만, 동독 정권이 무너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성 니콜라이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촛불시위였던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독 정권은 선거 일정을 앞당겼고, 그 선거에서 동독 국민 다수가 서독과의 즉각적인 통일을 앞세운 정당을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동독 정권이 서독의 콜 정권과 합의한 가운데 1990년 합법적인 통일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동독 교회는 그야말로 가장 격동적인 시간에 통일의 주역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랜 세월 이 연약한 동독 교회를 품고 무언의 영향을 미쳤던 서독 교회의 절제된 인내와 헌신과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한국 교회는 이런 서독 교회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수고로부터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교회 역시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평화와 통일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절제된 인내를 갖고 멀리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특정한 정치 이념이나 정치 체제에 갇혀 있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또한 철저하게 상대화할 수 있기에 오히려 항상 평화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 교회가 이 시대에 통일의 장애물이 아니라, 마중물이 되고, 통일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염원한다. <끝>
* 최현범 목사는 서울대와 총신대원 졸업 후 독일 보쿰대에서 신학박사(조직신학/윤리학)가 되었다. 독일 도르트문트제일교회를 거쳐 현재 부산중앙교회를 섬긴다. 부산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 대표인 그는, 동시대의 한국 교회의 윤리적 실천을 위해 힘쓰며 국가와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한국 그리스도인의 바른 행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일하고 있다. –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