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트신경 400주년 기념 논단| 도르트 총회의 역사적인 배경과 의미_박상봉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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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신경 400주년 기념 논단 <2>

도르트 총회의 역사적인 배경과 의미

 

< 박상봉 교수_합신|역사신학>

 

호마루스 중심의 목회자들은 1611년 알미니안누스의 입장을 반대한 ‘반항의서’로 반격했고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 이며 그리고 믿음은 잃어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도르트 총회는 알미니안주의의 오류를 정죄했다는 것만 아니라 4세기 펠라기우스 이래로 논쟁이 지속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근거한 구원, 교회, 신자의 삶이 명백히 규명되었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부르고뉴(Bourgogne) 영토에 속했던 네덜란드에서 칼빈의 신학적인 영향력은 1540년대 이래로 인적교류, 제네바 아카데미, 서적보급, 서신교환 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1555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스페인 출신 필립 2세(Phillip II.)의 ‘네덜란드에 대한 스페인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여 독립전쟁이 한창 진행될 때 네덜란드 개혁주의 교회는 견고한 조직을 갖추었다. 1609년 스페인과 12년 휴전조약을 체결하며 독립국가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에 네덜란드는 대내외적인 상황 속에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종교적인 관용주의가 확산되었다. 네덜란드 개혁주의 교회 내에서도 다양한 신학적인 논쟁이 발생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604년에 처음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던 야코부스 알미니안누스(Jacobus Arminianus)와 프란시스쿠스 호마루스(Franciscus Gomarus) 사이의 ‘예정론 논쟁’이다.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테오도르 베자(Theodor Baza)에게 배웠던 알미니안누스는 1586년 암스테르담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구원에 대한 예정론 교리를 비판하면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오류투성이라고 주장했던 디르크 코른헤르트(Dirck V. Coornhert)를 신학적으로 논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과정 속에서 알미니안누스는 코른헤르트의 입장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대해 의심을 품고 신인협력적인 보편구원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602년에 흑사병으로 죽은 프란시스 유니우스(Francis Junius)를 대신해서 레이든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될 때 그 자신은 주변의 의심을 떨치기 위해서 칼빈과 베자의 신학적인 입장에 철저히 서 있다는 사실을 소명해야 했다. 하지만 알미니안누스는 1604년 2월 7일에 열린 한 학술토론회에서 자신이 감추고 있었던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예지예정론을 드러내면서 결국 호마루스와 직접적으로 논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604년 10월 31일에 호마루스가 인간의 창조, 타락 그리고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를 주장하며 알미니안누스를 반박한 이래로 두 사람의 논쟁은 온 교회의 관심이 되었다.

 

  1609년 10월 19일에 알미니안누스가 사망했지만, 이 예정론 논쟁은 종결되지 않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계승되었다. 1610년에 요한네스 위텐보거르트(Johannes Wtenbogaert)를 중심으로 43명의 목사들은 보편구원론적인 입장이 네덜란드 교회 안에서 관용적으로 수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결행했다. 알미니안누스의 사상을 다섯 조항으로 정리한 ‘항의서’를 홀란드(Holland)와 서프리스란드(Westfriesland)의 주(州)정부에 제출한 것이다. 요약적으로 이렇게 이해될 수 있다: a. 하나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될 인간들을 작정하셨다. b.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인간들을 위한 것이다. c.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성령을 통하여 거듭날 수 있다. d.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인간이 저항할 수 있는 은혜이다. e. 성도의 견인에 대한 이해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주의 깊은 판단이 필요하다. 이 항론파들은 항의서의 논쟁점들과 관련하여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상충하는 입장들을 수정해 줄 것도 주장했다. 그 항의서는 8년 동안 계속된 다양한 논쟁들을 통해서 도르트 총회가 열리도록 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연히, 호마루스를 중심으로 한 목회자들 역시도 1611년에 알미니안누스의 입장을 반대하여 ‘반항의서’를 작성하여 반격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며 그리고 믿음은 잃어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반항론파들은 구원에 대한 인간의 역할을 인정한 항론파들을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위협하는 ‘비밀교황주의자들’로 인식했다.

 

  이 예정론 논쟁은 당시 복잡했던 대내외적인 조건들 속에서 ‘항론파들’의 신학적인 관용과 지방자치제를 지지했던 요한 올덴바르네펠트(Johann van Oldenbarnevelt)와 ‘반항론파들’의 신학적인 엄밀함과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지지했던 오라녜 마우리츠(Maurits van Oranje)의 불화 속에서 두 정치적인 진영의 첨예한 대립으로까지 발전되었다. 1617년 10월 6일에 국가총회 소집을 위한 위원회가 설치된 이래로 두 정치지도자의 긴장관계는 서로 간에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날 정도로 더 이상 합리적으로 풀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까지 치달았다. 결국, 이 사태를 심각하게 느꼈던 네덜란드 의회의 위임 아래서 마우리츠가 1618년 8월 29일에 올덴바르네펠트와 그의 세 동료들을 체포하여 감금시킴으로써 두 진영의 정치적인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그 결과로, 앞서 1618년 6월 25일에 공고된 국가총회의 개최가 현실화되었는데, 즉 1617년 11월 20일에 이미 결정된 장소인 도르트에서 오랜 논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네덜란드 국가총회가 1618년 11월 13일부터 1619년 5월 29일까지 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도르트 총회에 자국 인사들로는 네덜란드 주(州)의회들로부터 파송된 정치인 20명, 각 지역노회로부터 파송된 목사 30명과 장로 17명 그리고 네덜란드 다섯 대학교의 교수들 5명이 참석했다. 개회일 때 항론파 인사들은 우트레흐트로부터 겨우 3명만 왔고, 네덜란드 의회에 의해 소환된 회기 때인 1618년 12월 6일 – 1619년 1월 14일에는 15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1618년 6월 25일에 발송된 초청장을 받고 참석한 외국 인사들은 8개 지역의 27명이다: 영국(6명), 팔츠(3명), 헤센(4명), 스위스(5명), 제네바(2명), 브레멘(3명), 엠덴(2명) 그리고 나싸우-베테라우(2명). 프랑스와 브란덴부르크 대표는 다양한 내부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도르트 총회는 네덜란드 개혁주의 교회를 넘어선 유럽 개혁주의 교회연합의 국제적인 종교회의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도르트 총회를 통해서 펠라기안적인 구원론을 주장한 알미니안주의(항론파의 입장)는 정죄되었으며,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근거한 구원론이 다섯 가지 교리적인 항목으로 정리된 도르트 신조가 채택되었다: 전적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인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 그 밖에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네덜란드 개혁주의 교회의 신조로 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도르트 교회규범도 승인되었다.

 

  도르트 총회는 단순히 당시 활동했던 알미니안주의의 잘못된 가르침을 정죄했다는 것에만 의의가 있지 않다. 오히려, 가장 핵심적으로 4세기에 펠라기우스가 등장한 이래로 논쟁이 지속되었던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근거한 구원, 교회 그리고 신자의 삶이 명백하게 규명되었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 우리의 가려져 있는 눈을 열어서 인간적인 헛된 망상을 버리게 하고, 오직 하나님의 권리를 위해 나서게 한 것이다.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앞에 우리가 겸손과 경외로 엎드리며 사는 삶이 성경적으로 옳다는 것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다.


도르트총회의 모습(Synod of Dort, 1618-1619)

 

박상봉 교수 _ 안양대 신대원(Th.M.)
Universitat Zurich(Dr.theol.)
저서로 『칼빈과 종교개혁가들』(개혁주의 학술원) 역서로 『하인리히 불링거』(합신출판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