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Balance)
< 박용대 목사, 넘치는교회, 경기중노회장 >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다.
언젠가 이런 글을 보았다.
남자들에겐 여자에게 알리지 않고 싶은 비밀을 한 가지 정도는 가지고 산다고 한다. 필자의 남편은 그 비밀을 지갑에 두고 있는데 젊은 시절 남편과 데이트하던 어느 날 그의 지갑을 살짝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활짝 웃는 자신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결혼 후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 또 다시 남편의 지갑을 열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사진의 주인공이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학사모를 쓴 딸의 사진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의 세월이 흘러 지갑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사진의 주인공이 또 바뀌어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그 사진의 주인공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주인공은 한복을 곱게 입은 시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위 내용은 남편이 나이가 들었다는 느낌과 어깨가 예전과 다르게 조금 쳐진 모습이 생각나서 이젠 조금 더 잘해주어야겠다는 다짐의 글이었다.
사실 이 글에서 멋진 신앙적 이야기나 깊은 신학적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럴 능력도 없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하면서 항상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지킴과 변화라는 균형을 깨뜨리지 않고 유지해 나가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언제나 경험되어지고 지켜나가야 할 것이 아닌가?
얼마 전 총회체육대회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운동장에서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를 바라보며 교정의 모습 속에서도 지킴과 변화를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동안 교정의 모습도 여러 차례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 입학하여 다니던 남서울교회 지하실 그리고 일 년 후 옮긴 현재의 교정에는 덩그러니 본관 하나만 놓여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누리지는 못했지만 기숙사 건물이 들어선 모습과 그 후에 도서관이 들어서고 지금은 단장한 신부와 같이 아름다운 교정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변화를 보였다.
그러나 처음 설레던 반가움은 꼭 같다. 또한 학교를 대표하는 조병수 총장의 모습에서도 변화를 볼 수가 있었다. 축사를 하면서 너무 경쟁심을 유발하는 노회 대항이 아닌 노회 대항이 되어 서로를 섬기고 배려하는 노회체육대회가 되었으면 한다는 말씀이 있었다.
역시 합신을 대표하는 분다운 말씀이라는 흐뭇함으로 그 속에 지킴을 볼 수가 있었고 순간 신학교 시절의 선배의 모습과 오늘 총장의 모습이 순간 오버랩 되면서 모습은 조금 변했지만 좀 더 유머스럽고 여유로워진 변화의 모습에 감사했다.
필자는 목요일 아침이면 새벽예배를 마치고 주로 수지에서 만나는 L.C.M(Life Changing Movement) 모임에 참석하여 여러 목사들과 교제를 나눈다.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사들의 모임이며 작은 교회를 살리기 위한 범 교단적 목사들의 모임이다.
그 모임에서 우리 합신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다. 이유는 아직까지는 바름과 순수함의 지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변화라는 것에 있어서는 내가 너무 닫혀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심지어 우물 안 개구리라는 생각도 든다. 지킴은 잘하고 있지만 변화라는 것에 익숙해지지도 긍정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이미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이다. 이쯤 되니 라인홀드 리버의 평온을 비는 기도문이 생각난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또한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하루하루 살게 하시고 순간순간 누리게 하시며, 고통을 평화에 이르는 길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예수님처럼 죄로 물든 세상을 내 원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옵시며, 당신 뜻에 순복할 때 당신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을 믿게 하셔서, 이생에서는 사리에 맞는 행복을 저생에서는 다함이 없는 행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예수님은 균형이 있는 분이다. 그 분은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사람과 하나님께 사랑받으신 분이다. 그리고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며 예배에서 조차 균형을 말씀하셨다.
우리 또한 주님을 따라 우리들의 삶에서 균형을 갖추어 살아가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