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회복은 부활의 회복_박정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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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회복은 부활의 회복

박정환 목사_동암교회 부교역자

시작하는 말

“성교(기독교)를 중국에 전한 지 오랜지라 (중략) 이제 요긴한 말을 거두어 
한편을 만드나니, 청컨대 도를 깊이 느끼는 이는 자세히 보고 보는 대로 믿기
를 깊이 바라노라 (중략) 하나님은 한 몸에 세 위를 나누었으니 성부와 성자
와 성령이라 (중략) 천하 사람이 다 죄가 있어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니 마땅
히 하나님의 벌을 받아 지옥에 들어갈 것이로되 다만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심
히 크사 특별히 예수를 보내어 세상에 내려 사람을 구하사 믿는 자로 하여금 
길이 죽는 것을 면하고 길이 사는 것을 얻게 하시니라 (중략) 성령은 지극히 
조찰하시니, 만일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면 반드시 감화하여 착한 것을 행하
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의 도를 마땅히 행할 것을 힘써 행하니라 (이하 생
략)”

위의 글은 장황하지만 중국에서 선교하던 영국 선교사 존 그리피스(John 
Griffith)가 한문으로 작성한 것을 미
북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가 1890년에 
번역하여 사용하던 전도책자의 일부이다. 아마도 혹자는 ‘선교사들이 장황
한 삼위일체 신학을 늘어놓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반대로 생
각하면 선교사가 자기의 맡은 일을 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전달하고자 
했었다. 
이 전도지를 받은 우리 조상들의 입장에서는 비록 자신이 농사꾼이든 선비이
든 이 전도자들을 통해 생소하지만 분명한 ‘교리’를 전해 받았다. 나로 하
여금 무엇을 믿으라는 것이고 무엇을 결단하라는 것인지 확실히 전달받은 것
이다. 교리의 형성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단의 공격에 대해 대응하고 진리
를 수호하고자 하는 실제적인(practical) 동기에서 구체화된 것을 생각할 때 
짧고 분명한 말로써 진리를 전하고자 하였던 선교사들에게 하나의 방법으로
서 적당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형태와 비교할 때 몹시 부끄러워지는 대목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나도 모르고, 상대도 알 수 없는’ 복잡한 신학을 ‘신학할 
사람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라고 할 것이
다. 우리의 신앙의 기저가 이러한 생각, 즉 지식
과 실천은 다르다는 이분적
인 사고 위에 세워지기 때문에 신앙의 깊이가 사라지고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
리에게는 감격과 감사보다는 연합 행사로 인한 분주함이 가득한 것 같다.

1. 삶에 대한 고민조차 찾기 어려워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라든지 신앙적인 상담자가 되라고 하면 누구나 전도
에 대해서 부담스럽게 여긴다. 대부분의 경우 “목사님이나(전도사님이나) 그
렇게 하실 수 있지 우리 같은 평신도가…”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평신도에게 당연한 것이라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성경을 배우는 것은 학식을 쌓거나 상식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
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가르칠 수 있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고, 배운 것은 지켜져야 아는 것이 된다. 
우리가 배우고 아는 일은 ‘과정’이며 그것의 정당한 ‘목적’은 제자를 삼
는 것에 있다. 즉 전도하는 것이다. 배우는 과정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더
욱이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것은 포기할 것도 많고 참회라는 아픔과 고통도 
많다. 그러나 그 아픔은 선한 목적을 위해, 우리 생명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드려지는 밑거름이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라는 소명으로 목사가 되어서 겪는 문제들 가운데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가르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르쳐지지 않는데 
‘지키어 사는 것’은 더 기대할 수 없다. 한 때 유행처럼 지나쳐 간 「기독
교 세계관」은 이제 ‘내가 배웠던 것’일 뿐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내가 고민했던 것들, 즉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무
엇인가?’ 혹은 ‘어떤 직장을 구해야 하는가?’ 혹은 ‘어떤 배우자를 택해
야 하는가?’ 등등에 대하여 요즘의 후배들에게 명확한 대답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지금의 때에는 명확한 답이 있기에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 것
이 아니라는 말이다. 

2.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는 현실

여전히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세상의 처세술에 강해지고, 월급과 처우
에 따라 직장을 구하며, 매력적인 배우자를 구하게 된다. 모
두는 아닐지라도 
현실적인 흐름이다. 그러면서도 요즘은 청년들이라도 몇 번 들어본 말씀이면 
더 배우기를 꺼려하고 ‘뭔가 더 고급한 것이 없는가?’ 하며 기웃거린다. 
가벼운 QT정도의 성경 공부는 교회의 성도라면 거쳐가야 할 하나의 과정처럼 
되었고 신학적이고 다소 어려운 용어라도 사용되면 이는 ‘목회자의 것’처
럼 치부되는 것이 현실이다. 
과거에는 ‘소요리문답’은 어린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고 ‘대요리문답’은 
장년들의 기초 지식을 위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어린 자녀는 고사하고 장
년들에게조차 ‘소요리문답’은 생소하고 어렵다. 강단도 같은 생각이다. 어
차피 신학은 이해되지도 않고 어려운 것인 만큼 언급하는 정도로 그치고 현실
적인 문제를 쉽게 다루며 그나마도 수많은 예화와 영상으로 보고 느끼게 하
려 한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그 앞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까지 낮아져 
오시고 사람의 손에 세례를 받으시며 섬기는 종으로 사신 ‘비하의 삶’과 무
관하지 않다. 목자 잃은 양들의 선한 목자로 사신 그 삶과 무관하지 않다. 또
한 겟세마네의 피맺힌 기도와 십자가의 흉측한 죽음이 없이
는 결코 올 수 없
다. 
낮아짐이 없이 높아짐이 있을 수 없고, 순종이 없이 영광이 있을 수 없다(No 
Cross No Crown, No Pain No Gain). 이 단순한 진리가 빛 바랜 옛말이 되어
선 안 된다. 단지 부활절의 의미를 상승시키기 위해 또다시 고난 주간을 강조
하는 정도로 갈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바뀌고 우리의 예배 현장
이 바뀌어야 한다.
3. 고난 알아야 기쁨도 알아

전도사로서 중등부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부활절이 되면 기회를 얻는 대로 
‘부활절은 주일’이라고 외치곤 했다. 주님은 금요일, 안식일 전날에 십자가
에 못박히시고 급히 장사되신 이후에 주일, 안식 후 첫날에 무덤을 떠나셨
다. 초대교회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동시에 주일에도 떡을 떼며 하나님을 경
배하여 주일을 지켜왔다(행20:7). 
안식일이 안식에 들어갈 것에 대한 소망 가운데 6일 동안 준비하며 기다려 
온 마지막 날이라면 주일은 안식에 들어온 자들이 소망을 품고 6일을 맞이하
는 첫 날이다. 주일을 섬기는 신자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섬겼으니 주
일이야말로 부활의 기쁨과 찬송이 있는 예배요 잔치이다. 우리에게는 이 기
쁨 외에 
다른 기쁨이 없는 줄로 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에게 온전한 기쁨이 없는 것은 주일의 예배를 통한 기쁨
이 시대를 따라 상대적으로 작아졌다든지 혹은 애초에 완전한 것이 못되어 부
족함이 드러났다든지 해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많은 경우 예배 자체에서
만 원인을 찾지만 예배자인 우리의 문제는 ‘알아도 방법이 없는’ 영역처럼 
여긴다. 그러나 걸레를 들고 분주히 돌아다니며 아무리 집을 청소해도 내 발
바닥이 깨끗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이 겉을 바꾼다고 해서 속이 달라지지 않
는다. 그러므로 스스로 묻기를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일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는가?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여 들을 준비를 하
는가? 말씀을 들을 때에는 얼마나 나를 비춰보는가? 말씀을 듣고 난 후에는 
이웃에게 전하고 싶은 내용이 얼마나 가슴에 남았는가? 예배 이후에 집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는가? 자녀들에게는 어떻게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가? 가르
치기 위해서 얼마나 배우려고 힘쓰는가? 배우는 말씀에 얼마나 내 삶이 묻어
나는가, 얼마나 간증이 있는가?’ 

간증이 있는 사람은 더욱 간절히 바라기 마련이다. 어린 아이가 엄
마가 주는 
맛있는 반찬을 먹지 않으려 하는 것은 맛있는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
단 먹고 맛있는 줄 알면 더 달라고 떼를 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우고, 적용
하며, 아는 삶을 반복해야 한다. 
매년 성경 구절 하나를 마음에 새기고 한 해를 시작하는 신앙적 습관이 있는
데 그 때마다 주께서 정확히 그 말씀처럼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하곤 한다. 그
래서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연말이면 붙들 말씀을 위해 성경을 읽는다. 또한 
매년 낙심하는 일들이 나를 엄습해 와도 결국 감당할 만한 시험만을 주신다
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다시 고난이 찾아와도 비록 힘들고 마음이 어렵지만 
또다시 건져내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며 해마다 더해 가는 고난을 감당해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고난을 이겨봐야 승리를 알게 되고 고난이 있
어야 기쁨의 맛도 알기 마련이다.

4. 부활신앙 절기행사로 치부될 수 없어

주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것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는 것과 같다. 주께서 
부활하신 그 사건을 경험할 수 없는데 부활의 기쁨이 있을 수 없다. 한 때 로
마가 만든 절기들을 부정하고 ‘때와 날을 중시’하는 신앙을 비
판하던 우리
가 이제는 부활절에 사순절, 성령강림절, 추수감사절, 대강절, 성탄절 기타 
등등 달력을 보면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빽빽한 절기들이다. 
부활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부활절을 마련하는데 오히려 나머지 51주는 부활
이 희석되었다. 도리어 부활절마저도 행사로서 마무리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우리의 기쁨은 그 하루를 준비하며 ‘날과 때’에서 찾을 수도 회복할 수도 
없다. 우리의 삶의 자세를 바꿀 때 매일의 삶과 예배 속에서 찾아가야 할 것
이다.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묶었던 신발 끈을 풀고 겸손히 배움의 자리에 앉아야 한
다. 일정을 계획하기 위해 분주한 머리 속에 말씀이 채워져야 한다. 무엇을 
준비하기 위해 모이는 그 시간에도 말씀에 순종하는 연습을 쉬지 말아야 한
다. 
누구를 비판하며 무릎을 꿇리는 시간에 말씀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한다. 
내 생각을 말하기 앞서 잠시 입을 다물고 주님의 뜻인지 분별하는 자성의 시
간을 가져야 한다.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히 깨닫고 이해되지 않아
도 순종하는 바보, 세상을 향하여 바보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매일의 삶이 스스로를 쳐 복종시키는 
삶이 된다면 우리도 조금씩 사
도 바울과 같은 고백에 가까워져 갈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
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빌 3: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