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복음의 풍성함을 누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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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복음의 풍성함을 누리는 것

초대교회 성도들이 일요일 아침에 모여 예배드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도 예
수께서 부활하심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안식일인 
토요일을 성일(聖日)로 지키고 있는 사회적 환경에서 일요일에 모인다는 것
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대적 전통뿐 아니라 그 사회에 기반
을 두고 있는 모든 삶의 정황마저도 포기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
대교회는 기존의 전통과 삶의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일요일에 예배를 드렸
던 것이다.
모든 생활의 터전이 유대적 전통 위에 세워진 상황에서 기독교로의 귀의는 
곧 사회적 단절을 의미한다. 가깝게는 가족과 가문 그리고 친구들과의 단절
을 의미하며 넓게는 사회적, 국가적 단절을 의미한다. 그것은 유대 문화로부
터의 단절을 의미하며 지금까지 누려왔던 모든 삶의 방편까지도 포기함을 의
미한다. 때문에 당시 사회에서 기독교도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위협 앞
에 직면해 있음
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삶의 생기를 발휘하고 있었다. 
심지어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
는 성도들도 적지 않았다(행 2:43-47). 확실히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 구별된 
무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고 사회적인 능욕을 받으면서
도 오히려 기뻐하며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던 
것이다(행 5:41-42).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는 것을 자랑스러워했
다(행 11:26).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요즘 우리 주변의 기독교인들에게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누렸던 열심과 삶의 환희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주일 새벽부터 오후 늦
게까지 교회에서 봉사하고 돌아오는 성도들은 말 그대로 파김치처럼 온 몸이 
늘어져 있기 십상이다. 그런 상태로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생존경쟁의 대열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정신적 피로감의 누적으로 삶의 활기를 잃는 이
들도 있다. 반면에 어떤 성도들은 오전 대예배만 참석하는 것으로 교회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교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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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때문에 교회 생활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수동적 신앙 
생활에 젖어 있다. 이 상태가 오래 가면 영적 성장도 중단되고 말 그대로 주
일날 출석 숫자만 채우는 ‘썬데이 크리스챤'(Sunday Christian)으로 살아갈 
뿐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오늘날의 교회는 자꾸 무력해지고 있다. 소위 잘 나가는 몇
몇 교회는 교회의 대형화로 인해 피로에 지쳐있다. 이런 교회에서는 인적 자
원이 남아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썬데이 크리스챤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
다. 반면에 교회 일꾼이 적은 소형 교회는 과다한 봉사로 인해 기력이 쇠해
져 있다. 그 중에는 나름대로 교회 생활에서 위로와 기쁨을 얻는 이들도 있
다. 그렇지만 보편적인 현상은 그렇게 낙관적이질 못하다.
그런데 며칠전 한 성도로부터 충격적인 하소연을 접하게 되었다. 그 성도는 
중형 교회에서 오랫동안 교회 중직으로 남보다 열심히 봉사하고 있었기 때문
에 더 충격으로 와 닿았다. 그것은 매 주일 선포되는 설교에 대한 문제였다. 
즉 아무리 귀담아 설교를 듣고자 해도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
다. 그 교회 목회자는 그래도 상당히 명성이 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의외였다. 그 원인은 다른데 있지 않았다. 그 목회자의 설교
는 설교라기 보다는 신앙 강좌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 주일에 모여 예배한다는 제1차
적 기본 목적을 무시한 현실 교회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부활
에 대한 소망과 기쁨 없이 십자가만 높이 내걸고 있는 교회 건물을 보면 마
치 서양 어느 도시의 잘 다듬어진 공동묘지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닌
가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