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종교개혁 500주년 특강 _ 1
자유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
<주도홍 교수 _ 전 백석대 역사신학 | 개혁교회종교개혁 500주년 기념대회장 >
종교개혁자들은 죄로부터 자유, 자유케 하는 복음의 누림,
교황권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했다
개혁교회의 아버지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자유’이다
하나 _ 2019년은 개혁교회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개혁교회의 아버지’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H. Zwingli, 1484-1531)가 1월 1일 토요일 취리히 그로스뮌스터교회 취임예배에서 중세교회의 철학적 설교와는 다른 성경적 설교로 복음의 새 시대를 열었다. 에어랑엔대학교의 함(Berndt Hamm)은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자유의 종교개혁”(Reformation der Freiheit)으로 명명했다. 이는 종교개혁자 츠빙글리가 복음이 성도들을 얼마나 놀라운 자유로 불렀는지를 역설하며 가르쳤다는 말이다. 자유(libertas)는 종교개혁자 루터, 츠빙글리, 칼빈에게 더할 수 없는 중요한 개념이지만, 츠빙글리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들이 외쳤던 자유는 오직 믿음으로 얻어지는 죄로부터 자유, 율법의 굴레가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복음의 누림, 거대 교회 권력인 교황권으로부터의 자유로 요약된다.
둘 _ 1522년 츠빙글리는 중세교회가 지켜오던 사순절의 금식 전통을 깨는 설교와 글을 세상에 내놓으며, 자유의 종교개혁을 시작하였다.
금식은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한다. 츠빙글리가 여기서 가져온 성경은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였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자유롭게 음식을 선택하여 먹을 권리와 자유를 주셨는데, 중세교회는 교회법을 만들어 성도들에게 불필요하고 힘든 짐을 지게 했다. 츠빙글리는 이러한 억압을 깨뜨려 성도를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불러내고자 했다.
츠빙글리에게 교회법은 성경과 일치할 때만 유효하고,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전통까지도 성경에 근거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했다. 사람이 취하는 그 어떤 음식도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반해 공간과 시간을 제한하는 것은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금식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 나는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 놓겠습니다. 당신이 일을 하지 않을 경우에 많이 금식할 것이며, 당신이 자주 잘못된 습관으로 유혹하는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H. Zwingli)
츠빙글리에게 발견되는 중요한 자유가 있는데, 신학의 자유로 중세교회의 철학적 신학인 스콜라주의로부터의 자유이다. 츠빙글리는 이성의 지배를 받는 철학적 신학을 성령의 신학으로 전환할 것을 역설하였다. 철학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신학이 시작되는 것이지, 사람의 이성과 지혜로 신학을 하는 게 아니다. 츠빙글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게 된다고 확신했다. 츠빙글리에게 성령의 조명은 말씀 이해에 결정적이다. “우리는 스콜라 신학이라고 부르는 철학에서 나온 모든 지식은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신학은 인간적 기준에 근거한, 단지 학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그러한 신학으로 완전히 세뇌 당했을 경우에 사람들은 ‘신학은 외견상 확실한 것처럼 보이는 지식에 따라 정리되고 바뀌어져야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철학이 끝나는 곳에서 신학은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지식을 잘 배운 사람이 하나님의 교리를 훨씬 더 잘 판단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인간적인 이성의 빛이 하나님의 명확성을 압도하고 밝혀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H. Zwingli)
츠빙글리는 교부들의 신학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도 언제나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했다. 츠빙글리는 교부들의 오류가 성경 해석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밝히며, 중세교회가 교황의 권위를 교부들에게 두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빛이 비추기 시작하면, 어둠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모든 위선의 부스러기들과 겉껍질은 날아가 버리고, 새로운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 복음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서 사람의 이성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것입니다.”(H. Zwingli)
츠빙글리는 잘못된 기도로부터의 자유도 말한다. 기도하는 자들이 벗어나야 할 두 가지로, 기도를 물질적 요청으로 이해하는 것, 하나님께서 기도의 양에 따라 보상하는 그 어떠한 공로로 이해하는 태도이다. 소리 내어 입술로만 하는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고, 조롱이다. 츠빙글리에게 그리스도는 율법의 굴레로부터 믿는 자를 자유 하게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율법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으로 정의와 선의 영원한 원천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선에 대한 규칙이고 기준이다. 문제는 죄에 빠진 인간이 그 율법의 요구를 따라가지 못함이다. 츠빙글리에게 영원한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중세교회 성도들에게 수도원 삶은 중요한 경건의 기준이었다. 수도자처럼 살아야 바른 신앙인이었다.
이에 츠빙글리는 이의를 제기하며, 수도원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쳤다. 수도복, 여러 종교적 상징물, 삭발 관습을 위선과 가면으로 정죄하였다. 사람들은 성직자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일반 교인들과 구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마음의 위선’, ‘위선자들의 가면’이라는 것이다. 힘써야 할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서로를 향한 섬김, 사랑, 겸손이다. 츠빙글리에게 수도원은 폐지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은 ‘단순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모두가 평등한 위치로 주를 섬김이 마땅하다.
츠빙글리는 성욕과 결혼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며 중세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하였다. 결혼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권리이다. 하나님은 돕는 배필 하와를 아담에게 주셨는데, 이는 “아담 이후 모든 남성은 여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순결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살도록 한 사람들만이 가능하다. 그 한 예가 고자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성적 욕망을 허락하셨다. 성적 욕망을 절제할 수 없는 사람은 마땅히 결혼해야 한다. “결혼을 원하는 성직자들을 인간쓰레기 같은 존재가 아니고, 귀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 쓰레기 같은 존재는 성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결혼 생활을 선택하려는 사람들은 오히려 건전한 사람들입니다.”(H. Zwingli)
츠빙글리는 성도들이 중세교회의 고해성사로부터 자유할 것을 가르친다. 야고보서 5:16을 제시하며 서로 죄를 고백하며 서로 기도해 주는 관계가 바람직하다. 신부에게 하는 고해성사보다 하나님께 직접 고하는 세리의 짧은 참회가 훨씬 귀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없이 하는 것이지, 그 어떤 참회 수단으로도 죄를 없이 할 수 없다. 참회 제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사람의 공로로 돌리려는 시도로서 명백히 잘못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는 행위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이다.
마지막으로 츠빙글리는 잘못된 성례 이해로부터의 자유를 내세운다. 루터와 격론에 이르기까지 했는데, 이는 츠빙글리만의 독자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1526년, 1529년 츠빙글리가 루터의 성례 이해와는 명확하게 다른 입장을 제시하여, 결국 루터교회와 스위스 개혁교회 사이에 역사적 긴장이 시작되어야 했다. 츠빙글리를 향해 루터는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Schwaer mer)로까지 불렀다. 츠빙글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찬에서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다.
츠빙글리는 성령의 조명을 강조하며,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는 말을 상징적으로 이해하며, 그 어떤 음식을 먹고 마시느냐보다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의 육체를 먹음으로써 그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 적이 없다.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 6:54-56의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다. 성찬은 믿는 것이지, 먹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죽음을 기념하고 감사하면 충분하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그 몸을 먹을 때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설명하고 명령하는 말씀을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서 그를 기념하라고 한 것을 믿고 그를 기념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실제의 몸이 죄를 사해 주기 위해 제공된다는 것을 절대 믿어서는 안 됩니다. … 이 사실을 수긍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루터의 추종자일 뿐입니다.”(H. Zwingli)
셋 _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자유의 렌즈로 들여다보았다.
과연 어떤 맥락에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이 ‘자유의 종교개혁’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츠빙글리가 말하는 자유는 단지 그 어떤 중세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남 내지는 무책임하고 무원칙적 방종이 결코 아니었다. 츠빙글리는 언제나 원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주의 진리인 성경이었다. 그 성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는 성령, 성령의 조명이었다. 교부신학 역시 성경의 관점에서 재고되어야 했다. 츠빙글리는 잘못된 중세교회, 그 교회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역설했다. 중세교회 교회법이 순전히 인간적이고 이성에 근거한 법으로 인식했다. 성도에게 부여된 자유를 시간과 공간에서 제한하는 것은 그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행위이다. 사순절의 금식은 성도의 선택이지, 교회법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믿는 것이지, 먹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미 갈보리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기에, 성찬을 먹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츠빙글리가 이 땅에서 천국의 온전한 자유(absoluta libertas)를 향유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천국의 자유로의 여정에 그리스도인은 순례자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망가진 세상에서 죄악과 부단히 싸워야 한다. 자유를 향한 싸움이다. 죄악의 종노릇에서 벗어나 자유로 초대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다시는 종노릇하지 않아야 하는 자유인이다.
자유는 ‘개혁교회의 아버지’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이해하는 키워드임이 확실하다. 한국교회가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자유의 종교개혁’으로 받아들여 다시 숙고하고, 더욱 바르게 개혁신학을 인식하는 기쁜 책무를 2019년에 견고히 붙들었으면 한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말대로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바로 알지 못하면 양심은 거의 매사에 망설이게 되고, 자주 주춤거리거나 지체하며, 항상 동요하고 걱정에 시달리게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도 바로 알 수 없다.
주도홍 교수의 최근 저서 『처음 시작하는 루터와 츠빙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