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성경 해석에 대하여 _ 강현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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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성경 해석에 대하여

<강현식목사 _ 북서울노회 전도목사>

 

소위 ‘성령주의적’ 성경 해석과 설교가 난무할
시대를 뚫고 가는 개혁적 교회를 굳건히 세워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를 전달하는 통로인 성경. 그 성경이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진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그 증거들을 통해 확실시되는 재림이다. 역사 속에 신령한 진리를 담은 것이기에 성경은 역사적 사건들과 언어적 체계를 따라 해석의 기초를 가져야 하지만, 역사와 언어 속에 당신의 진리를 담아 놓으신 하나님 자신의 해석이 무엇보다 중요한 해석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계시하신 내용이 역사와 문법 속에 있어 성경의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당연시할 것이나, 그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의도와 뜻에 따라 해석의 틀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역사적 문법적 해석조차도 무시하곤 하는 작금의 한국 교회로서는 그나마 역사적 문법적 성경 해석을 주장함도 가상한 일이지만, 그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의 자기 계시로서 성경은 신론적으로 해석하는 틀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참 먼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흘러가면서 역사적 변곡점들을 품게 되고 시기마다 새로운 시선들을 차용하게 된다. 성령님의 조명 아래에서 신령한 성경 해석이 가능하다는 새로운 조류들이 나오고 있고 나올 것이며, 이 조류들에 의해 ‘신론적 성경 해석’이라는 개혁주의의 성경 해석의 틀이 상당 부분 잠식될 것이다.

예를 들면,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문을 작성하여도 강단에서 설교하다 보면 꼭 설교문대로 하게 되지 않는다. 성령께서 그 시간에 주장하시는 대로 하게 된다. 그래서 설교는 목사가 준비하지만 설교를 행하시는 이는 성령님이시다.”는 이야기들이 많아지고, 이 보편적인 인식이 확산되면 ‘그 시간 역사하시는 성령’을 의지한 설교가 보편적인 설교 패턴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순복음교회나 침례교, 성결교, 감리교의 성령운동주의자들 속에서 이런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때이다. 그러나 성령에 사로잡힌 설교인지 성령에 사로잡힌 척하는 설교인지 잘 분간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많이들 속고 있다. ‘역사적 사실로 영적 진리를 담아낸다.’는 것이 인간들로 하여금 성경을 오해, 오용할 수 있는 많은 제안들을 일으키는 단초가 된다.

그래서 그나마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성경 해석의 기초로 삼고, 성경은 성경 자체로 풀어야 한다는 ‘성경 신학’의 주장과 그 노력은 참으로 신선하고 고결한 정신으로 남는다. ‘성경은 그 자체로 진리에 대해 명료하고, 성경은 성경 자신이 성경을 해석하는 자증의 성격을 가진 계시이다’는 고백 위에 성경 신학은 자리하고 있다. 이는 옳고 지켜져야 할 복음적 성경 해석의 마지노선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 해석은 방어의 수단이 아니고 세상을 향한 공세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없이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죽은 존재이며, 하나님과 화목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기에 그렇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세상에 임박한 진노와 심판을 말하며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는 도리로서의 복음을 전해야 할 우리로서는 우리의 성경 해석이 세상을 향하여 공세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 자체적으로 역사적 사실 속에서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과 진리에 대해 명백한 의미와 해석을 내리고 있다. 성경의 명료성과 자증성이 있음이다. 성경을 성경으로 풀 때, 성경 해석의 최종 권위는 성령님께 있다. 성경 해석의 최종 권위인 성령님의 성경해석이 옳은지를 결정하는 최종 권위는 성경 자신이다.

인간은 성경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의 조명은 다시금 성경 자신의 최종 권위로 돌아간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마12:24). 이렇게 오해의 가능성이 있는 인생들이기에 계시의 최종 권위는 성경 자신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처럼 성령의 감동으로가 아니면 바르게 해석 될 수가 없다는 이야기는 성령의 조명도 성경의 최종 권위 아래에 있음이 된다는 뜻이다.

일단의 복음주의는 이러한 성경 해석의 함수 관계를 잘 고려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기독교 진리를 전달받는 성경은 성경 해석의 최종 권위가 된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성령님의 조명이 있다. 그런데 성령의 조명 아래 이루어지는 성경 해석의 최종 권위는 또한 성경 자신에 있다. 이 함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성경과 성경 해석에서의 성령의 조명은 성경 자신의 최종적인 계시가 되어 교회의 기초가 된다.”는 개혁주의의 교회관(즉, 성령론)의 기초가 이 함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우리는 현대 사조 이후 전통적인 성경과 설교의 틀을 깨고 재기발랄한 소위 ‘성령주의적’ 성경 해석과 설교가 난무하게 될 시대를 뚫고 가는 개혁적 교회를 굳건히 세워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