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이 있는 책상| 기독교와 윤리 _ 김영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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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이 있는 책상 – 다시 만나는 특강

기독교와 윤리

<김영재 교수 _ 전 합신 역사신학>

 

|기독교 신앙과 생활|

<기독교 신앙과 생활 | 김영재 지음 | 272면 | 1990년 | 성광문화사>

 

◈… 하나님은 윤리적인 선행과는 상관없이 은혜를 베푸셔서 백성을 삼으시고 윤리적인 삶을 살게 하신다.

◈… 율법은 신령하고 선한 것이며 그 기능은 계속 유효하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주지 못한다.

◈… 우리는 쉼 없이 성경에 비추어 사회의 상황과 시대정신을 분석, 비판하고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 기독교와 윤리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에서 유강 김영재 교수의 가르침을 나누기 위해 그의 오래된 저서 <기독교 신앙과 생활, 성광문화사, 1990>에서 그 주제와 관련된 부분을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한다. – 편집자 주

 

종교와 윤리는 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두 계명으로 요약하여 말씀하시면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각각의 계명이 아니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다 같은 하나님의 하나인 계명을 나누어 볼 때 첫째와 둘째라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종교적인 계명,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 이라는 말씀이다. 종교와 윤리는 하나이지만 먼저 종교가 있고 윤리가 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존재의 근원이시며,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화평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 자기의 가치를 되찾고 사람다운 윤리적인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고, 부모나 처자를 그리스도 자신보다 더 사랑하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화평하는 관계는 스스로 의를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윤리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윤리적인 선행과는 상관없이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윤리적인 삶을 살게 하신다.

하나님과의 종교적인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는 사람이 자기의 존재 의의와 가치를 상실한 패여서 윤리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는 사람이 아무리 이웃을 사랑해도 다함이 없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기 때문에 종교적인 의미에서 죄인일 뿐 아니라, 윤리적인 선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선행으로 충분한 것으로 생각하며 스스로의 의로 만족하는 위선자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종교적인 법을 아무리 지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윤리적인 계명을 소홀이 하거나 실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어기고 있기 때문에 죄인이며,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사람으로 착각을 하거나 자부하면 위선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은 각기 시대적인 상황을 따라 종교적인 계명을 지키도록 더 강조하거나 혹은 윤리적인 계명을 지키도록 호소하였다. 즉 주전 8세기의 아모스 선지자 이전의 모세를 포함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점령하여 정착해 살면서 가나안의 민속 종교에 동화되는 일이 없도록 경고하고, 또한 동화되어 갈 경우 이를 질책하는 말씀을 주로 하고 있으나, 아모스를 비롯하여 586년 유다가 바빌론에 포수되기 이전까지의 선지자들은 우상을 버리라는 말씀과 함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하나님께 화려하게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과부와 고아를 돌보지 않고 사치하고 방탕하며 사회 정의와 공의를 저버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음을 본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모스 5:21-24, 참조: 이사야 1:10-17).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예레미야 7:4-7).

예수님의 산상보훈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모든 것을 은밀히 보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영생의 도리를 찾는 청년에게, 즉 종교적인 문제로 문의하는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윤리적인 계명을 지키는지 물으신 것도 종교와 윤리가 하나임을 시사하는 말씀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그러하거니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도 윤리적인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하나임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라”(요한1서 4:8,16)고 말씀하는 요한 1서에 보면 하나님 사랑은 곧 이웃 사랑으로 구현되는 것임을 거듭거듭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한1서 4:19-21).

또한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여 종교와 윤리가 하나임을 강조한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진리를 강조하는 바울에게서도 종교와 윤리가 하나임을 가르치기는 마찬가지이다.

 

율법과 복음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안다. 그뿐 아니라 율법을 받지 못한 사람도 이러한 보편적인 진리를, 적어도 윤리적인 계명을 양심으로 안다. 사람이 법을 어기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그를 선량한 시민으로 혹은 훌륭한 도덕적인 사람으로 존경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일 뿐이다. 사람은 아무도 윤리적인 계명을 충분하다고할 정도로 지키지 못하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이미 정죄함을 받아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죄인이다. 스스로 의를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누구든지 자신의 내면을 충분히 살피는 사람이면 –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설 때만 가능하다- 바울과 같이 자기 안에 비종교적이고 비윤리적인 자기가 있음을 발견하고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절규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의를 율법 아닌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완전하게 순종하심으로써 의를 행하시고 또한 자신을 제물로 드려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속하셨다. 이것이 곧 복음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로를 믿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된 우리가 의롭다고 간주함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사람으로 산다. 종교적이면서 동시에 윤리적인 사람으로 사는 것이 곧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율법이 우리를 생명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기능을 못한다면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그것은 죽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로마서 7:1-7). 율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고 동시에 폐하여졌다. 그러나 그것이 율법 자체가 죽었다거나 무용하다는 말은 아니다. 율법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엄연한 말씀이며 우리의 삶과 행위를 위한 규범으로서 그것은 항상 살아 있고 유효하다. 그것은 마치 엑스레이가 우리 몸에 있는 병을 밝혀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율법은 신령하고 선한 것이다(로마서 7:12). 율법의 기능은 계속 유효하다. 그러나 환자가 병이 있음을 알려 주는 진단 자체가 치료가 아니듯이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 주고 우리의 죄를 더 죄되게 할 뿐 근본적인 치료는 주지 못한다. 우리 인생을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구원을 주는 치료는 오직 복음으로 말미암는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그대로 유효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 계명이 정죄와 심판으로 속박하는 계명이 아니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늘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래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필요함을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하는 계명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 주신 종교적이며 또한 윤리적인 계명을 새롭게 이해하며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산다는 말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칭의의 교리를 말하고 지지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 같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생활을 강조하였다. 루터는 인간의 선행이 구원의 조건은 결코 될 수 없으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감사함으로 선을 행하여야 함을 강조하였으며, 칼빈은 신자의 성화의 교리를 말하여 이를 강조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로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과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성화되어 가는 삶이란 곧 온전하신 사람으로 사신 예수, 하나님을 순종하시는 가운데서 가장 윤리적으로 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며 닮아가는 삶을 말한다.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지만 또한 가정의 일원으로, 사회의 일원으로 산다. 다시 말하면 수많은 이웃 속에서 산다. 복잡한 산업 사회에서 살면서 당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하고 우리가 직면하는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를 성경은 낱낱이 말씀하지 않는다. 에베소서에는 결혼 생활에 관한 말씀이 있고,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말씀과 부모가 자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씀이 있으며, 주인과 종이 서로 지켜야 할 도리를 말씀하고 있다(에베소서 5:22-6:9). 국가 혹은 권세자에 대하여 취할 자세에 대한 말씀도 발견한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인 말씀들이 우리의 다양한 일상생활의 행위를 다 포괄하지 못한다. 자상한 행동지침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대 강령에 근거하여 윤리적인 행동지침을 발견해야 한다. 범죄를 금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염두에 두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이웃 사랑을 성취하는 목적의식을 늘 가지면서 말씀에 근거하여 무엇을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아서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소수일 경우 그리하여 핍박 하에 있었던 시점에서는 교회를 중심하여 경건을 지키는 일에만 힘썼다. 윤리적으로 모범을 보이기는 했지만 사회를 향하여는 소극적인 자세를 가졌었고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교회의 자체가 되는 시점에 와서는 교회는 사회를 윤리적으로 교화시키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었고 사회의 도덕과 윤리에 대한 책임을 느꼈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수가 많다거나 온 국민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기독교적인 윤리와 문화를 가진 사회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부패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심판을 받는 일이 없었을 터이고 중세교회가 부패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경건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많아져서 교회가 건전한 신학을 가지고 윤리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생동력을 계속 지닐 때만 가능한 것이다.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의 윤리적인 삶은 세상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이면서 동시에 세상 나라의 시민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로, 존경받는 부모로, 착한 자녀로, 선량한 백성으로 살아야 하고, 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정치, 경제, 법률, 과학과 기술, 문화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하고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종교 기관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는 사회 속에서 교회에 부여된 직무를 다할 뿐이다. 즉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며 가난한 자 병든 자를 돌아보고 윤리의 대강령인 사랑을 가르치며 실천하고, 교회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정의가 실현되며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도록 기원하며 불의를 경고하는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가정 살림을 우리의 손으로 꾸려 가듯이 보다 광범한 우리의 마을의 공동체의 살림에도, 사회의 삶에도 참여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쉼 없이 성경 말씀에 비추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상황과 시대정신을 분석하고 비판해야 하고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또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인 나 자신과 교회의 생각과 삶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반성해야 하고 교회와 함께 내가 늘 새로워져야 한다.

 

* 김영재 교수 / 서울대 종교학과, 영국 클리프톤신학교(Clifton Theological College)를 졸업하고 독일 부퍼탈신학교(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에서 수학. 마르부르크 필립 대학교(Philipps Universität zu Marburg) 신학박사(Dr. thel). 독일, 미국에서 목회하고 서울대, 고려신학교, 총신대원 교수를 거쳐 1990년부터 합동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역임 후 2006년에 은퇴. <기독교신앙과 생활><교회와 신앙고백><한국교회사><한국기독교의 재인식><교회와 예배><믿음 그리고 행함><기독교교회사><그리스도인의 매뉴얼><기독교교리사><되돌아보는 한국기독교><기독교 신앙고백><지각생의 간증> 등의 저서와 <이성에서의 도피><도피하는 현대인><칼빈의 교회관><요한 세바스찬 바흐> 등의 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