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총회교직자수양회 강설| -셋째 날 저녁- “두 증인으로 살자”_박병식 목사

0
173

2018 총회교직자수양회 강설 -셋째 날 저녁-

“두 증인으로 살자”
요한계시록 11:1-11

< 박병식 목사_송파제일교회 원로>

 

교계가 진정으로 영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우리는 늘 물어야 한다

교회는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 곧 하나님의 말씀만을 말해야 한다

참 교회는 그 시대의 죄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고 그 영혼들의 구원에 매달린다

교회는 죽지 않는다. 온 세상 곳곳에서 적은 무리로 고난과 시련을 받고 있는 두 증인에게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들어가신다

 

  주님께서 요한 사도에게 지팡이 같은 한 갈대를 주셨다. 그 갈대로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고 말씀하셨다(1절). 갈대는 요단강 계곡 습지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줄기가 곧고 길고 단단하여 길이를 재는 측량자로 사용되었다. 이 자는 어떤 사물의 짧고 긴 길이를 측량하였다. 그리고 곧은가 굽은가를 알아보는 잣대가 되었다. 점차 이 자는 사물을 측정하는 표준이나 척도가 되었다. 히브리인들은 자로 사용되는 지팡이 같은 갈대를 ‘카네’라고 불렀다. 헬라인들은 이를 ‘카논’이라고 불렀다. 이 카논이라는 말은 단순히 측량의 의미를 넘어 진정성이나 허위성을 판가름하는 기준을 뜻하게 되었다.

  이후에 성경을 정경으로 삼으면서 정경을 ‘캐논’이라고 불렀다. 캐논이란 엄밀한 기준에 의하여 그 권위와 참됨을 교회가 공적으로 인정한 책들이란 의미였다. 또는 기독교인의 신앙과 행위의 척도가 되는 책들이란 의미로 캐논이란 말이 보다 구체화 되었다. 주후 367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가 그의 부활절 서신에서 신약 성경 27권을 나열하고 이를 캐논(정경)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후 교회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을 정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성경은 정경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권위와 사도들에게 주신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다. 성경은 캐논이다. 즉 정확한 자이다. 어떤 경우든 성경에 맞으면 옳다. 그러나 성경에 맞지 않으면 틀리다. 이는 지금도 변함없다. 이제 요한은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성경으로 측량해야 한다. 성경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측량해야 한다. 여기 성전은 성전(히에론)이 아니라 성소(나오스)이다. 성소는 지성소를 의미한다.

  요한이 이 말씀을 받을 때는 주후 90년경이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성전은 이미 20년 전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완전 파괴되어 없었다. 측량할 성소도 제단도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는데도 측량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와 동일한 일이 구약 시대에도 있었다. 에스겔 40장에서 48장까지가 성전 측량이다. 그러나 에스겔이 생존할 당시 이스라엘에는 성전 자체가 없었다. 바벨론 제국이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면서 솔로몬이 지은 성전도 완전히 파괴하였다. 보이는 성전이 없는데 하나님은 성전의 모양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아주 자세하게 성전을 측량하는 것을 보여 주셨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솔로몬 성전을 측량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땅 전체를 측량하시면서 이를 성전 측량이라고 말씀하셨다.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을 하나님은 측량하신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백성을 측량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백성 중에서 자신의 백성을 찾아내시기 위한 측량이었다. 성전으로 측량된 땅을 여호와 삼마라고 불렀다. 여호와 삼마란 말은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의미이다. 에스겔에게 보여 주셨던 성전 측량은 바로 구약 교회였다. 다른 말로 말하면 당시 누가 진정한 성도들인가를 하나님은 측량하셨다. 하나님의 측량에 들어온 구약 성도들은 살아있는 성도들이었다. 여호와 삼마의 약속을 받은 성도들이다. 이 성도들이 살아있음을 겔47:3-5은 말한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천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천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은 없으나 살아있는 성도들이 작은 무리가 되어 이스라엘 전국 여기저기에 있었다. 이들이 바로 구약 교회였다.

  그리고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곧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 물은 성전에 넘쳐 아라바로 흘러 들어갔다. 아라바는 갈릴리 바다에서 사해에 이르기까지 흐르는 요단강이다. 그러자 아라바에 생명이 흘러 넘쳤다. 물속에는 수많은 고기들이 살았다. 그리고 강 좌우에 온갖 식물들이 번성하였다. 그 물이 사해로 흘러들어가자 죽은 바다가 살아 물속에 생물이 가득하게 되었다.

  측량하라고 명하신 성소와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신약 교회를 의미한다. 신약 교회란 신약 시대의 성도들을 의미한다. 누가 신약 시대의 진정한 성도인가를 성경으로 측량해야 한다. 여기 측량에 들어가면 주님께 속한 백성이 된다. 하나님의 측량에 든 교회는 여호와삼마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교회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보호하시고 풍성한 은혜로 온 세상을 살리는 은혜로 가득 채워 주시는 교회이다. 진정한 교회, 진정한 성도들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오순절교를 구별하지 않고 그 안에서 측량에 든 교회요 성도들이다.

  어떤 경우에도 여기 성전(성소)은 건물이 아니다. 성전과 제단은 합하여 성소 즉 지성소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경배하는 성도가 곧 성전이요 성소이다. 거듭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에게 고전3:16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말했다. 고전6:19-20도,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 말한다. 시멘트와 철근과 벽돌로 멋있는 집을 지어놓고 이를 성전이라고 하면서 그 안에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성도들이 세상 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느낌이나 경외함이 없으면서도 교회당에 들어오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어떤 느낌이 있고 경외심이 생기면 안 된다. 이교도들이 온갖 거짓된 것으로 신전을 꾸며놓고 그 안에 들어만 가면 두려움과 경외를 사람들로 느끼게 하는 것과 우리는 달라야 한다. 분명 달라야 한다. 예배당을 성전이라 하고 세상에서는 아무렇게나 살다가 예배당에 들어와서는 경건해지고 긴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는 사람들이다.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 즉 성도들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표이다. 측량의 목적은 보존하기 위함이다. 측량의 본뜻은 참 믿음에 서있는 성도들을 헤아려 보려는 것이다. 측량 자로 사용되었던 지팡이는 구약 정경이었다고 확신한다. 요한이 요한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란 교계를 빗대어 말할 수 있다. 교계가 진정으로 영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우리는 늘 물어야 한다.

  마흔 두 달은 단9:27에서 말하는 한 이레의 절반이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을 것”이라고 했다. 한 이레는 한 주간 즉 7일이다. 7일 중 하루를 일 년으로 치면 7일은 7년이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7년을 절반씩 나눈다. 이를 일반적으로 전 삼년 반과 후 삼년 반이라고 한다. 합하면 7년이 된다. 동일한 의미로 삼일 반과 삼일 반으로도 말한다. 합하면 7일이요 역시 7년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 때 두 때 반 때와 또 다른 한 때 두 때 반 때라고도 말한다. 합하면 일곱 때이다. 이는 역시 7년을 의미한다. 역시 동일한 의미로 42달과 42달이라고도 말한다. 42달과 또 다른 42달은 역시 7년이다. 1260일과 또 다른 1260일이라고도 말한다. 1260일과 다른 1260일은 당시 월력으로 7년이다. 앞의 삼년 반을 전 삼년 반이라고 말한다. 뒤의 삼년 반을 후 삼년 반이라고 말한다. 전 삼년 반은 교회의 부흥기요, 후 삼년 반은 교회의 환난기로 이해한다.

  예언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조금 숨겨 놓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그대로 말하지 않고 비유적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정확히 7년의 기간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 주님의 재림 전에 7년이라는 대환난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7년이라는 말은 여자적인 수가 아니다. 삼년 반, 삼일 반, 한 때 두 때 반 때, 42달, 1260일과 같은 다양한 숫자를 우리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통해 교회가 혹독하게 치룰 대 환난기가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의 측량에 든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두 증인이다. 3절과 4절은 말한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두 증인은 누구인가? 두 증인은 변화산에 나타났던 모세와 엘리야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제자를 데리시고 변화산에 올라가셨다.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변화하셨다. 그리고 놀랍게도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세분은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하여 말했다(눅9:31). 예수님께서 받으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 말한 것으로 보인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 복음에 대하여 증거 했던 구약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본문에 나타난 두 증인은 종말에 가서 모세와 엘리야의 정신을 계승하여 그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종들이다. 두 증인을 4절은 “이 땅의 주 앞에 서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말한다. 이는 슥4:14을 인용한 말씀이다. 슥4:14이 말한 두 증인은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인 교회를 가리킨다. 둘이라는 수는 숫자라기보다는 법정에서 요구하는 증인의 수를 의미 한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바로 복음을 증거 하는 참된 교회이다. 슥4장에 의하면 두 감람나무는 기름을 두 촛대에 공급한다. 그런 의미에서 감람나무는 성령의 역사를 상징한다. 두 감람나무는 두 촛대에 끊임없이 기름을 공급하는 성령님이시다. 참 교회는 끊임없이 성령님의 충만한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아 두 촛대에 꺼지지 않는 빛을 밝힌다.

  두 증인 된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 사건을 그대로 증거 해야 한다. 복음 증인은 자기의 사상이나 혹은 심지어 자기의 신앙 체험까지도 증거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자기의 사상은 그리스도 사건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 증인은 그리스도 사건만 증거 해야 한다. 숫자 놀음만 일삼으면 안 된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별로 없었다. 이를 보고 아파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렘15: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교회는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 곧 하나님의 말씀만을 말해야 한다.

  두 증인은 굵은 베옷을 입었다. 굵은 베옷은 회개할 때 입은 옷이다(왕하1:8, 사22:12, 렘4:8, 욘3:5, 마3:4). 회개를 외치는 두 증인에게 적합한 옷이다. 이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했다. 계18:4-6은 말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성전 밖 마당을 짓밟고 거룩한 성을 짓밟는 교회의 인본주의와 세속주의를 회개했다. 세상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도 슬퍼하고 통회한다. 참 교회는 그 시대의 죄에 대하여 연대책임을 지고(히11:17) 그들의 영혼의 구원의 문제에 매달린다(겔3:16-21). 이들은 1260일 동안 예언한다. 예언은 복음 증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이다. 복음 증거는 개인과 시대를 향한 예언이다. 그들의 현재와 장래를 결정지어 주는 예언이다.

  이 예언한 날 동안 누구도 이들을 막지 못한다. 5-6절은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두 증인이 예언하는 날 동안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대적들을 삼켜 버릴 것이다.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불로 승리하였다(왕상18:19-40).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가 엘리야를 강제로 구인하기 위해 오십 부장과 군사 오십 명을 보냈다. 엘리야가,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라고 말하자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오십 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다. 이런 일이 두 번이나 계속되었다(왕하1:1-12). 교회가 두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면 그 말씀은 생명이 되어 사람으로 구원을 얻게 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불로 그들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렘5:14은,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라고 말한다. 원래 선지자의 말은 회개를 권하는 것이지만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의 불길로 임하게 될 것이다. 약5:17-18은 말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살아있는 말씀의 권세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두 증인의 사역을 한다.

  두 증인된 교회는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게 됩니다. 모세는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그 이후 아홉 번이나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 땅을 쳤다. 두 증인 된 성도들이 이렇게 능력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될 것이다.

  교회가 능력 있게 두 증인으로 1260일 동안 말씀을 증거 하였다. 그 이후를 7-10은 말한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는 42달 곧 1260일이 지난 때이다. 무저갱으로부터 한 짐승이 올라온다. 1260일이 지나자 짐승이 올라온다는 말이 아니다. 이 짐승은 붉은 용이요, 악한 사탄이다. 이 짐승은 에덴동산에서부터 등장했다. 그러므로 짐승이 올라온 시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 짐승 그 악한 사탄의 출처를 가리키는 말이다. 짐승의 출처는 바로 무저갱이고 무저갱은 지옥이다. 이 짐승은 지옥으로부터 올라왔다. 이 짐승이 주로 함께 일하는 다른 두 짐승이 있다.

  계13장은 이를 말한다. 한 짐승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다. 이 짐승에게는 열 뿔과 일곱 머리가 있다. 이 짐승은 세상의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진 세상 나라들이다. 다른 한 짐승은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다. 새끼 양처럼 생겼는데 그 머리에는 두 뿔이 달렸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듯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것처럼 거짓으로 꾸민 적그리스도이다.

  이들은 두 증인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킨다. 강한 사탄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온 세계의 나라가 두 증인의 적이 된다.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강하게 두 증인의 적이 된다. 그들은 두 증인을 이긴다. 숫자로 이긴다. 그 숫자의 힘으로 이긴다. 그 숫자가 끼치는 영향력으로 이긴다.

  세상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열 뿔이라는 다양한 세력들이 교회를 이긴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 운동, 기술, 의술, 건축, 법률 등 다양한 세력들이 교회를 이긴다. 그들은 두 증인을 죽인다. 많은 두 증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저희와 동화되어 그 심령들이 다 죽게 될 것이다.

  그들의 죽은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 한다. 또 애굽이라고도 한다. 소돔과 애굽은 악의 전형이다. 전자는 도덕적 타락의 도시였고, 후자는 세상 적 권세와 경제력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고 멸시했던 나라였다. 불경건과 도덕부패가 세력화 되어 교회를 박해하는 일은 이 세상이 갖는 속성이다.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었기 때문이다. 히6:4-6은 말한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는 어느 한 곳에서만 된 일이 아니다.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교회가 시체가 되어가는 것을 본다. 백성은 정치적으로 모인 집단이다. 족속은 혈통적 유래를 따라 모인 집단이다. 방언은 언어가 같은 사람들이 모인 국민이다. 나라는 생활 습성이 유사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다. 교회가 시체화되는 일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날 현상이다. 시체는 프토마이다. 집합체를 가리키는 단수명사이다. 많은 교회들의 집합체가 된 한 시체가 되었다. 신앙은 언제나 개인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살아있는 성도들은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교회는 프토마가 되었다. 엘리야는 호렙 산 어느 굴에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오직 나만 남았다”고 슬피 말했다(왕상19:10). 하나님은 “내가 칠천 명을 남기리니”라고 말씀하시며 위로 하셨다(왕상19:18). 전체적으로 교회가 프토마가 되어 버렸다. 교파마다, 교단마다 다 프토마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본다. 그리고 그 시체를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한다. 큰 거리에 시체를 그들은 보며 즐기기 위하여 결코 없애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의 시체를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그리고 서로 예물을 보내며 축하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다.

  이는 두 선지자, 두 증인이었던 교회를 통해 엄청난 괴로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두 증인은 땅에 거하는 자들을 한없이 괴롭게 하였다. 두 증인의 외침이 저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불신자의 마음에 심한 가책과 마음의 고통을 받게 하였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은 세상의 죄를 책망했다(딤후4:2).

  길거리에서, 동아리 모임에서, 버스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미션 스쿨에서, 복음 병원에서, 길거리마다에서 사람들은 복음을 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이런 복음 증거는 그들에게 너무나 지겹고 힘들었다. 간음 폐지를 항의하며, 동성연애를 반대하며, 진화론을 반대하며, 낙태를 거부하는 교회 때문에 저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이제는 교회가 시체로 화했기 때문에 교회로 인해 고통을 받을 이유가 다 없어졌다. 저들은 마음대로 666운동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진리로 나라를 다스렸던 나라는 어느 곳에도 어떤 때에도 없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무엘 다윗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이 다 외로운 나그네들이었다. 모세 시대에도 모세는 외로운 나그네였다.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던” 시대였다. 이스라엘 왕정의 역사는 죄악사였다. 왕정 시대의 모든 선지자들은 외로운 나그네들이었다. 이상적인 교회가 이 땅에 언제 있었는가? 진리는 증거 되기 위하여 있는 것이지 다스리고 주관하고 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을 책망하고 회개케 하는 일이며 구원하는 일이다. 진리가 왕 노릇하고 진리가 그 시대를 다스리는 일은 이 세상에서 오지 않는다. 후 삼년 반 기간 동안 성도들은 끊임없이 박해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의 바람과 소망이 이 땅에 없음을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 하였다(11절). 교회는 결코 죽지 않는다.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기가 두 증인 속에 들어간다. 교회가 시체가 되었을 때에도 두 증인은 적은 무리로 살아있었다. 온 세상 곳곳에서 적은 무리로 고난과 시련을 받고 있는 두 증인에게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들어가신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생명의 기운이 들어갔다. 교회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고 예언하기 시작하였다.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이 교회를 살리실 때 세상은 이를 두려워한다. 프토마를 보고 기뻐하던 무리들에게 교회의 살아남은 큰 두려움이 되었다. 교회를 보고 증인들을 보고 저들은 크게 두려워하였다. 생명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일어났던 미국에서 일어났던 생명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게 되기를 우리는 기대하며 소망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