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외래특강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 언어
-감동과 생명력을 자아내는 두 가지 설교 수사법의 비밀-
< 김진규 교수_백석대|구약학>
예수님의 설교와 비유에는 감동 깊은 그림 언어가 넘쳐난다
우리의 머리는 장황한 문장의 설명보다 간단한 도식을 쉽게 이해한다
호소력 있는 설교를 위해 주석 작업 외에 그림 언어로 보완함이 필요
설교에 유용한 대구법의 다양한 방식을 연구하고 적용하자
오늘날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있기까지, 약 반 세기 전에 흑인의 인권 회복을 위한 위대한 연설이 하나 있었다.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행진’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 Jr.)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지금도 그의 연설을 듣노라면 가슴 깊이 감동이 넘친다. 그의 연설은 왜 그렇게 감동적일까? 그의 연설은 왜 그렇게 생명력이 넘칠까? 그는 어떻게 청중의 마음을 휘어잡았을까? 그의 연설에는 고대 히브리 시인들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과 똑같은 감동의 원리와 생명력의 원리가 살아 숨 쉬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가장 탁월한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성경도 예수님의 탁월한 설교에 대해 증언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마 7:28). 예수님의 설교에는 당시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다른 뭔가가 있었다.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가르쳤기에 사람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을까. 예수님의 가르치심에는 두드러진 스타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림 언어'(image)와 ‘대구법'(parallelism)의 빈번한 사용이다. 이 두 가지 수사 기법이 히브리 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림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필자가 눈을 뜨게 된 계기가 있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박사 학위논문을 쓰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당시 해마다 한국에서 목회학 박사과정 학생들이 강의를 듣기 위해 필라델피아까지 왔다. 당시 이들을 위해서 여러 해 강의 통역을 맡았는데, 어느 여름에는 오기로 한 시편 강사가 사정상 오지 못해서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필자에게 시편을 강의하도록 부탁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시편뿐만 아니라 목회학 박사과정 학생들이니 이들을 위해서 설교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를 주고 싶어 설교학책들도 함께 읽었다. 그때 시편의 두드러진 문체인 그림 언어와 대구법이 청중들의 마음에 생동감과 생명력을 불어넣고 마음속에 감동 감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문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미 설교학자들은 그림 언어나 반복법(대구법)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히브리 시인들이 사용한 풍성한 그림 언어에 대한 분석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년간 연구한 끝에 집필한 책이 필자의 졸저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생명의말씀사, 2015)이다. 시편을 읽을 때 산문체와는 다른 감동과 생명력이 넘쳐난다. 그 이유가 바로 빈번한 그림 언어 사용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레위기 1장과 시편 23편을 함께 읽어 보라. 당장 그 차이를 느끼게 될 것이다. 시편 23편을 읽으면 푸른 풀밭에 목자가 양떼 가운데 서서 어린양을 안고 있는 모습이 마음속에 그려질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표현이 나오면 가파른 절벽에서 헤매는 양을 목자가 끌어올리는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이런 이미지 생성 능력이 바로 그림 언어에 담겨져 있다.
어느 누구보다 예수님은 그림 언어의 힘을 잘 아신 분이다. 예수님의 설교에는 그림 언어가 넘쳐난다. 산상수훈만 보더라도 예수님은 수많은 그림 언어로 설교하셨다. 형제를 비판하지 않도록 눈 속의 ‘들보’와 ‘티’라는 그림 언어를 사용하셨고, 진리를 아무에게나 주지 않도록 ‘개’, ‘진주’, ‘돼지’라는 그림 언어를 사용하셨고, 기도 응답에 대해 가르치면서 ‘아들’, ‘떡’, ‘돌’, ‘생선’, ‘뱀’이라는 그림 언어를 사용하셨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좁은 문’과 ‘넓은 문’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설명하셨고,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양의 옷’, ‘이리’, ‘열매’, ‘가시나무’, ‘포도’, ‘엉겅퀴’, ‘무화과’라는 그림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셨다.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를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그림 언어로 설명하셨다.
그 외에 예수님의 수많은 비유가 그림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예수님의 많은 비유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들인데, ‘천국’의 심오한 진리를 비유라는 그림 언어로 아주 쉽게 설명하셨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알곡과 가라지 비유, 감추인 보화 비유, 그물 비유, 혼인 잔치 비유,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등 이런 하나님나라의 비유들이 모두 그림언어로 구성된 설교들이다.
왜 그림 언어가 호소력이 있는가. 이는 인간의 이해 방식 때문이다. 인간은 추상적인 논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화랑에 그림을 그리듯이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의 머리는 장황한 문장으로 된 설명보다 간단한 도식을 쉽게 이해한다.
워렌 위어스비(Warren Wiersbe)는 “우리는 언어를 가지고 말하고 쓰는 일을 하지만, 생각을 할 때는 언제나 영상이나 그림을 통해서 한다”라고 했다(<상상이 담긴 설교>, 32쪽). 맥닐 딕슨은 “인간 정신은 철학자들이 뿌려 놓은 그릇된 인상처럼 토론장이 아니라 차라리 화랑이라고 해야 한다. 이 화랑에는 우리의 모든 비유와 개념들이 그림처럼 걸려 있다. (중략) 비유란 종교와 시의 본질이기도 하다”라고 말한다(<상상이 담긴 설교>, 32쪽에서 재인용).
위어스비와 딕슨의 말을 들어 보면, 왜 우리가 그림 언어로 표현할 때 호소력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신학도들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고도로 추상화된 신학적 개념으로 중무장하고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는가. 이런 추상화된 언어들이 우리의 설교 시간에 때로는 여과 없이 쏟아지지 않는가. 게다가 히브리어 헬라어까지…. 이런 추상적인 용어들은 설교를 따분하고 지루하게 만든다.
19세기 설교의 황태자라 불리던 찰스 스펄전 목사는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20대부터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는 스펄전의 탁월한 영성뿐만 아니라 그의 설교에는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뛰어난 그림 언어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란 사실을 제이 아담스(Jay Adams) 교수는 밝히고 있다. 스펄전의 설교를 ‘감각적 호소'(sense appeal)의 관점에서 그는 분석하고 있다. 스펄전의 감각적 호소가 바로 시각·청각·미각·후각·촉각으로 구성된 그림 언어를 뜻한다. 스펄전이 했던 설교에서 실례를 보자.
“예수님의 피 흘리는 손이 긍휼을 떨어뜨리는 갈보리의 십자가로부터, 구세주의 피 흘리는 땀구멍들이 용서를 흘리고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부터, 부르짖음이 들려옵니다. ‘나를 보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중략)’ 그곳을 바라보세요. (중략) 그의 손이 당신을 위해서 못 박혔습니다. 그의 발이 당신을 위해 피를 솟구쳐 흘렸습니다. 그의 옆구리가 당신을 위해 넓게 열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긍휼을 입는 방법을 알기를 원한다면, ‘보라’여기에 있습니다”(Adams, <Sense Appeal>, 9쪽에서 재인용).
스펄전의 묘사는 특히 시각적·청각적 그림 언어로 넘쳐난다. “긍휼을 떨어뜨리는 갈보리의 십자가”, “용서를 흘리고 있는 겟세마네 동산”, “부르짖음이 들려옵니다”, “나를 보라”, 못 박힌 손, 피가 솟구쳐 흐르는 발, 넓게 열린 옆구리…. 모두 그림 언어다.
우리의 설교 준비는 단순히 성경의 주석 작업으로 끝나지 말아야 한다. 주석 작업은 본문의 메시지를 파악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계이고, 설교를 호소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림 언어로 보완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그러면 그림 언어는 어떻게 만드는가. 이 부분은 앞으로 기회가 되면 설명하겠다.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자연 속의 그림 언어, 사회 문화 속의 그림 언어, 도시 문화 속의 그림언어, 과학기술 문명 속의 그림 언어, 영화·드라마·스포츠 속의 그림 언어, 현시대의 사상적 흐름 속의 그림 언어, 행동으로 보여 주는 그림 언어 등을 다루고 있다.
사람의 변화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우리 마음속의 그림 언어가 바뀌어야 변화가 일어난다. 크래독의 말을 들어보자.
“그림 언어들은 다른 개념들에 의해서 대치되지 않고, 다른 그림언어들로 대치되는데 아주 천천히 그렇게 된다. 사람의 머리가 설교자의 사상에 동의한 오랜 후에도 옛날의 그림 언어들이 여전히 마음속에 걸려 있을 수 있다. 그 그림 언어가 바뀌기까지 사람은 정말 변화되지 않는다. (중략) 이 변화는 시간이 걸리는데 왜냐하면 사람이 갈 수 있는 가장 긴 여정이 있다면 아마 머리에서 마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Fred B. Craddock, <As One Without Authority>, 64쪽).
설교를 들을 때 감동을 일으키는 또 다른 중요한 설교 수사법은 대구법이다. 2001년 9월 17일자 「타임」(Time)지는 티 디 제익스(T. D. Jakes) 목사를 미국 최고 설교자로 선정했다. 표지에 그의 사진과 함께 “이 사람이 다음 세대 빌리 그레이엄인가?”(Is This Man the Next Billy Graham?)라는 찬사가 따라 붙었고, 그를 ‘대가’(virtuoso)이며 ‘천재’(prodigy)라고 격찬했다.
필자는 그의 신학적 노선에 모두 동의하기 때문에 그의 실례를 인용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설교 수사법(대구법)이 워낙 탁월하기 때문에 인용할 뿐이다. 제익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그가 자주 사용하는 반복적 대구법에 압도당한다.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것을 두고 자칫 지겹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효과는 그런 생각과 정반대이다. 그가 반복적 대구법을 사용하면 할수록 그의 메시지는 더욱 더 깊이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비결을 터득한 것은 불과 몇 십 년밖에 되지 않는다.
수천 년 동안 성경의 시인들이 사용한 대구법의 비밀을 깨닫지 못했다. 잘못된 신학적 전제들 때문에 오랫동안 성경의 대구법에 대한 해석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와 히브리 문학에 탁월한 두 유대인 학자가 대구법이 감동을 유발하는 원리를 발견했다. 이로 인해 히브리 시를 이해하는 데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히브리 시에서 대구를 이루는 구절이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이런 반복으로 의미가 더욱 강화, 강조, 고조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하버드 대학 쿠걸(James Kugel) 교수와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 올터(Robert Alter) 교수가 발견한 대구법의 귀중한 원리이다.
예를 들어, 이동원 목사가 사용하고 있는 대구법의 실례를 보자.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모든 것이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나라에는 여러분이 목말라 하는 영생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는 여러분이 원하는 평화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는 당신이 추구하고 있는 의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는 당신이 그리워하는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는 넘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 나라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이 나라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동원, 『이렇게 찾으라』, 17-18쪽)
이동원 목사는 “이 나라(하나님나라)에는… 있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청중의 가슴에 사무치도록 전달하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수사법은 수구반복을 통해 강조하는 계단식(혹은 점증적) 대구법이다. 이런 표현은 글로 된 것보다 실제 설교를 음성으로 들을 때 훨씬 더 강렬하게 와 닿는다. 쿠걸과 올터가 발견한 사실은 이런 반복이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반복하면 할수록 내용을 더욱 강화, 강조함으로써 감동을 자아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성경학계에서 히브리 시를 이해하는 데 이토록 큰 변화가 일어났지만 안타깝게도 이 학자들의 이론이 지금까지 설교에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대구법이나 반복법의 중요성은 알았지만 대구법의 ‘강화의 원리’를 설교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이론으로 정립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제 설교에 ‘강화의 원리’에 기초한 대구법 이론을 도입한다면 누구나 그 원리를 터득해 설교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대구법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필자의 책에서 밝히고 있다. 설교에 유용한 대구법은 어떤 것인가? 대구법은 어떻게 구성하는 것인가? 대구법이 왜 청중의 심금을 울리면서 감동을 유발하는지 등을 다루고 있다.
대구법에 나오는 반복의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교학의 대가인 브라이언 채플은 이미 알고 있다(아쉽게도 그는 히브리 대구법 이론에 기초하지 않고 그냥 반복법의 중요성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반복은 청중의 마음에 더 깊은 의미를 각인시킨다. 반복은 기록된 글에서는 단순해 보이고 불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숙련된 설교자는 ‘반복이 가장 강력한 구두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읽는 사람과 달리) 듣는 사람은 앞에 지나간 것을 다시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반복은 설교자가 청중에게 힘주어 말하고자 하는 곳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결과적으로 신선한 구절로 표현된 중요한 사상들은 설교 전반에 걸쳐서 후렴처럼 메아리쳐 울려 퍼지는데, 이는 핵심 사상의 중요성을 알리는 신호이다”(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118쪽).
김진규 교수
<에스라 연구소>(EzraInstitute.org) 소장, 저서로는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생명의말씀사, 2015), 기독교 인성교육 지침서 시리즈 <온전한 사람(영성편)> (생명의샘, 2017), 하브루타 성경연구 시리즈 <시편 아가> <욥기 잠언 전도서> <구약성경 개관>(생명의샘, 201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