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특강| 아브라함의 축복<2>_김진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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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특강

아브라함의 축복<2>

 

< 김진수 교수_합신|구약학 >

 

아브라함을 통해 형성될 새 민족은 인간의 원 사명, 즉 다스리는 직무를 회복해야한다

구약의 성도들은 이 땅에서의 모든 행, 불행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믿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을 누리려면 모든 부정한 것들을 제거하고 거룩해야한다

 

  다음으로 언약의 축복은 또한 후손의 약속을 통해 구체화 된다(창 12:7; 13:15-16; 15:3-5). 이것은 언약의 축복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파트너가 될 사람들이 없다면 언약관계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신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들을 약속하신다(창 22:17). 이것은 다시금 ‘창조언약’을 상기시킨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을 주셨다(창 1:28).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창조의 계획(인간의 생육과 번성)을 계속 이루어 가시려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출애굽기에 넘어오면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이 놀랍게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본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출 1:7). 신약에서 사도들이 설교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모습 또한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라 할 수 있다(cf. 행 2:41; 4:5).

 

 그렇다면 아브라함을 통해 생겨날 새로운 민족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창조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명령 속에 들어 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다(창 1:28). 알다시피 ‘정복’과 ‘다스림’은 왕의 직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창조시 하나님은 인간에게 왕의 직무를 주셨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왕의 직무란 인간의 독단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를 거부함으로써 인간은 피조물을 다스리는 위치에서 오히려 피조물을 섬기는 종의 위치에 떨어지고 말았다. 타락 이후 사람들은 피조물들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가 하면(롬 1:25),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매여 일생 종노릇하며 사는 처지가 되어버렸다(창 3:17). 따라서 아브라함을 통해 형성될 새로운 민족은 인간의 원래 사명, 즉 다스리는 직무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사실상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역사를 보면 그들이 세상에 대하여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아브람은 애굽 왕 바로와 그랄 왕 아비멜렉에 대하여 영적 권세를 가진 자로 나타난다(창 12:10-20; 20:1-18).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하는 동안 가축들의 번식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로써 그가 세상을 다스리는 자의 위치에 있음이 드러난다(창 30:37-43).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들을 정복하였을 뿐 아니라(수 12) 주변 민족들까지 지배하게 되었고(삼하 8), 나아가서 솔로몬 시대에는 동물계와 식물계까지 풍요롭게 된다(왕상 4:20-28).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나 이처럼 세상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갔을 때 그들은 주변 민족들의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마침내 지배당하는 위치로까지 전락하였으며, 피조계는 그들에게 질병과 기근을 비롯한 각종 재난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이처럼 구약에서 건강, 풍요, 지배권과 같은 세상의 축복이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기계적으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다 할지라도 세상의 삶에서 질병, 가난, 압제를 당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는 말이다. 예컨대 요셉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의 미움을 사서 노예로 팔려갔고, 심지어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감옥에 갇혀있기도 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었으나 오랜 세월 동안 사울의 박해를 받으며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또한 시편에서 우리는 악인들의 형통과 의인들의 고난으로 인해 고뇌하는 성도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시 73편). 무엇보다도 이 문제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인물은 욥이다. 알다시피 욥은 하나님이 칭찬하고 자랑하실 정도로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적들의 공격과 천재지변으로 재산과 자녀들을 모두 잃고, 심각한 질병의 희생물이 되기도 하였다.

 

  이 모든 사실은 세상의 축복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반드시 정비례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구약의 성도들이 이 땅에서 만나는 모든 행, 불행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믿었으며(삼상 2:1-10; 욥 1:21; 2:10), 그런 믿음 안에서 불행과 재난조차 기꺼이 끌어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죽음이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면서도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6). 이런 신앙의 정수가 바울의 다음 고백에 녹아들어 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

 

  여기서 세상의 지배권에 대한 문제를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범죄가 하나님과에 관계에 균열을 가져오고, 그 결과 인간이 지배자(하나님의 대리 통치인)에서 종의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창조시 인간에게 부여된 지배권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죄에 빠뜨린 악의 세력을 궤멸할 ‘여인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게 만든다(창 3:15). 이 ‘여인의 후손’이 누구인가?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창세기를 읽어 가면 자연스럽게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후손’에 대한 이야기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람의 후손들 가운데서 죄의 문제를 해결할 구원자가 나타나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게 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날 구원자는 대체 누구인가? 창세기 17:6을 보자: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창 17:6). 이 구절은 아브라함의 후손들 가운데 왕들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예언은 다윗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열왕의 역사에서 성취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 구약 이스라엘의 어떤 왕도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과 피조물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들에게 지배받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할 ‘후손’에 대한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신약으로 넘어와서야 비로소 발견된다. 신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한 분에 대해 이야기 한다(마 1:1). 세례요한은 그분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하였다(요 1:29).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죄 문제가 완전히 극복되었다는 것을 안다. 놀랍게도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 부른다(벧전 2:9). 이렇게 보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후손의 약속과 왕들에 대한 약속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 연합된 백성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의 권세를 가질 것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마 14:22-33; 계 2:26-27; 22:5).

 

  지금까지 우리는 아브라함의 축복(=언약의 축복)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증표라 할 수 있는 할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한 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10-11). 이 말씀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표로서 할례를 행해야 했다. 따라서 할례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언약백성)의 정체를 확인해주는 기능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할례를 행함으로써 자신들이 누구이며, 자신들이 어떤 백성들이 되어야 하는지를 자각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할례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할례’는 난지 팔일 된 남자 아이의 양피를 자르는 의식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특별한 의식을 요구하셨을까? 남자 아이의 양피를 자르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여러 상경학자들이 설명하듯, 할례는 부정한 것의 제거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정결케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셨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정결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정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몸과 마음, 육체와 영혼 전체를 포함하는 전인적인 정결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음의 할례를 강조하는 모세의 설교에서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하나님은 할례제도를 통해 자기 백성들이 언약의 축복을 누리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온전히 성결하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이셨다. 이것은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한 레위기의 말씀과 통한다(레 19:2). 신약의 저자들 또한 거룩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거룩함을 좇지 않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히 12:14). 따라서 신구약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룩이 없으면 하늘의 것이든 땅의 것이든 참된 축복을 누릴 수 없다. 옛 이스라엘은 거룩히 구별된 백성으로 존재해야 할 소명을 저버렸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감사하게도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이 말씀은 우리 스스로는 부정한 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힘입어 거룩한 자가 되었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축복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아브라함 축복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라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땅과, 자손과, 다스리는 권세 등 여러 가지축복들이 주어졌지만 그 모든 축복의 핵심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또한 우리는 아브라함 축복의 외적 증표가 할례라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모든 부정한 것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거룩함이 없는 생의 축복들이 약속된 적이 없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건강, 물질, 명예, 행복 등이 정결함과 거룩으로 인 쳐진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만이 부정한 우리를 온전히 정결케 하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로 세우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