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이 있는 책상| 매티 노블의 조선 회상_매티 윌콕스 노블 지음

0
373

등불이 있는 책상

어느 선교사의 일기에 나타난 3.1운동

 

매티 노블의 조선 회상

| 매티 월콕스 노블 지음, 손현선 옮김, 좋은 씨앗, 2010년 7월, 677쪽, 값 24,000원 |

  한국 기독교 선교 초기 언더우드, 아펜젤러, 닥터 홀 등과 교류하며 사역했던 아더 노블 선교사의 부인인 매티 노블 선교사의 자상한 필체로 쓰인 일기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자료이기도 하다. 1892년부터 1934년까지의 생생한 사역과 삶의 기록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를 건너는 당대 조선의 영적 형편과 삶의 정황들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그 중에 특히 3.1운동의 상황을 기록한 일기를 보면 당시의 선교사들과 한국교회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행동하는 일에 자연스레 교파를 아울러 단합하였음을 알 수 있다.

– 편집자 주

 

<매티 노블 선교사 가족>

 

♣ 1919년 3월 1일 _ 해방을 경축하는 거사

  “오늘은 조선에 있어서 위대한 날이다. 이들의 기쁨이 얼마나 지속될지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오후 2시에 상급학년, 그러니까 중등학교 이상 모든 학교가 일본의 조선통치에 반하여 휴교했다. 그리고 일제히 거리로 나와 행진을 하며 팔을 제치며 모자를 던지며 ‘만세’(조선의 만세수를 빈다는 뜻)를 외쳤다. 거리의 행인들도 합류했다. 온 도시에 기쁨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난 창밖으로 대궐 담벼락 모퉁이까지 길게 한 줄로 이어진 행렬을 볼 수 있었다. 공립여학교들(Government Schools for Girls)도 행렬에 동참했고, 남학생 한 무리가 이화학당을 지나는 길에 교내로 들어와 여학생들에게 나오라고 했다. 여학생들은 몰려나갔으나 기모노를 입은 월터(A. J. Walter, 이화학당 교사)양이 달려 내려가 정문을 걸고 여학생들을 저지했다. 테일러(Corwin Tayler)씨와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배재학당 교장을 지낸 아펜젤러 2세)씨는 월터 양을 도우러 갔고 여학생들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여학생들은 울부짖고 일부 남학생들은 거의 이성을 잃었지만 여학생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가던 길을 가야만 했다.

  오늘 오전 전단지가 도심 거리 곳곳에 흩뿌려졌다. 전단지는 조선의 전(前)황제가 일본 정부 앞잡이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살해 목적은 황제가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이 일본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걸 막기 위함이라고 했다. 2시에 거리는 ‘조선은 오늘 2시부터 자유다’란 알림문이 쏟아졌고 사람들은 이걸 믿고 행복해했다.

  2시에 교회 목회자들은 정부 내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동등한 권리 행사를 요청하는 청원서(독립선언문)를 제출하였다. 우리가 듣기론 오늘 시위는 만국평화회의 이전에 독립선언을 알리려는 계획의 일부라고 한다. 오늘 거사는 조선, 하와이, 미국에서 평화회의로 파견된 사람들에게 통보되었다. 온 나라가 평화회의 특사들과 하나가 되어 평화회의에 앞서 메시지를 반포함으로써 연합국의 (정부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대표단들에게 조선의 특사들이 전할 말에 힘을 실어 주려는 분위기였다.”

 

♣ 1919년 3월 2일 _ 33명의 민족대표

  “조선이 일본과 동등한 대표권을 가져야 한다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목회자들은 다른 거사엔 참여하지 않았다. 이 목회자들은 조용히, 기품 있게 자신의 몫을 했다. 30명의 남자 대표가 서명을 했다.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 목사들, 불교와 천도교 대표들로 모두 33명이다. 대표자 전원이 어제 구속되었고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한 소년들도 구속되었다. 가엾은 사람들. 이들은 자신들의 조선을 향한 애국심을 세계의 뇌리에 각인시키길 그리도 원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