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논단
나의 믿음의 분량은?
<나택권 장로_호산나교회>
믿음은 말씀으로 양육되고 사용되고 단련됨으로써 튼튼하게 자란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우리를 붙드심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가진 믿음보다 더 큰 것을 주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믿음의 분량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그 믿음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믿음은 자라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마25:25에 나오는 말씀처럼 자기의 믿음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다루고 있다. 자신의 믿음을 그저 수저통에 곱게 넣어놓은 수저처럼 다룰 뿐이다. 즉 믿음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몇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 싶다.
첫째, 믿음의 분량은 자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을 우리가 어떻게 다루느냐는 철저하게 나에게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믿음의 분량은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분량을 자라게 하는 것은 바로 나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자랄 수 있게 하시려고 여러 방법을 공급하여 주신다. 마4:4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먹여 주는 것과 실제적 신앙생활이라는 운동을 통해 자라게 하신다.
교회에 목회자들을 세운 목적도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성숙하게 하는데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목회자들에게, 양떼들에게 젖을 줄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기에 말씀으로 양떼들을 자라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음식을 아무리 잘 먹는다 해도 적당한 운동을 하지 않으면 건강한 육체를 유지 못하는 것처럼 믿음을 위해 말씀을 먹어야 하고 그 믿음을 운동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근육이 연약하여 믿음을 통한 역사를 이루지 못한다. 즉, 모든 믿는 자의 믿음은 자랄 수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고 그것이 사용되고 단련됨으로써 튼튼하게 자라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믿음은 끝없이 자라나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까지 이른다.
믿음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양육되고 단련받기 위한 시간이 걸린다. 지금의 위치에 있는 그 믿음이 양육되고 단련되면 믿음은 점점 자랄 것이고 더불어 하나님을 점점 더 잘 믿게 됨으로써 현재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큰 것으로 보이는 것들도 믿음이 점점 자라게 되는 그날에 이르면 큰일에 대해서도 작은 일을 구할 때의 믿음처럼 구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믿음은 끝없이 자라나 마침내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보자. 저들과 같은 들꽃은 지정된 장소에서 자란다. 하지만 우리 사람들은 그 지정된 곳에서만 지내려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는 뿌리 내리지 못하고 곧 시들어 버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듭났다고 해서 그 즉시 온전한 신앙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거듭난 후 처음에는 외적 환경에 흔들리기도 하는 등 신앙의 일관성이 없어진다. 그러나 말씀의 양육과 단련으로 자라나게 되면 그제야 외적 환경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게 되어 하나님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영적인 삶이 풍성해진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는 말씀으로 양육 받는 일과 훈련 받는 것 등을 멈추지 않는 신앙생활을 계속해야 한다.
셋째, 믿음은 언제나 각 개인의 생활 속에서 구체화 되어야 한다.
우리 믿는 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자기를 체념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실현을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을까? 욕망이라고 하는 무거운 물통을 이제는 비우겠다는 것일까? 세상을 향한 애달프고 고단한 그 길을 그만 접으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것저것 다 접어두고 새 힘을 얻어 더 달려가려는 기도일까? 우리의 궁극적인 기도는 구원을 겨냥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믿음의 절벽이 있었다.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했던 눈을 외적 환경을 바라봄으로써 영혼이 쇠약해져서 믿음을 잃어버릴 뻔했던 위기가 있었다. 인간의 행위의 반복은 습관을 만들고 이 습관이 성품을 이루고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악한 습관의 배후에는 불신의 인격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매순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시선을 멀리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도를 지키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급성인후농양으로 ○대학 병원에 입원하여 긴급히 수술을 받아야 하는 어려운 환경을 맞았다. 아내의 인후농양수술은 목을 절개하여야만 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수술이었다. 나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아내의 손을 잡고 기도를 했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아내가 이렇게 큰 수술을 받아야 하는 원인도 저 때문이고 현재 상황도 저 때문입니다. 하나님! 간절히 기도 하옵나니 아내의 수술이 잘될 수 있도록 집도 의사의 손길과 환경을 지켜 주셔서 수술이 잘 되게 해 달라”고 통곡에 가까운 기도를 드렸다. 2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났다. 기적이 일어났다. 목을 절개하지 않고 입 안을 통하여 수술할 수 있었다고 의사가 오히려 감격하면서 위로를 했다. 아내의 수술을 목을 절개하지 않고서 끝낼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사랑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나로서는 전과 다른 믿음의 행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은 언제나 각 개인의 생활 속에서 구체화되고 그 생활 속에서 드러내도록 믿음을 단련시키기 위하여 환경을 조성하고 그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는 것을, 그리고 믿음은 지성과 이성에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알고 생활해야 하는 것, 믿음의 뿌리는 그 힘을 아는 지식이 전부라는 것을 알고 날마다 말씀으로 양육 받고 신앙훈련을 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