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현대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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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규 목사>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미래사회의 전체적 위기에 대해 기독교만 대안이 될 수 있어”

기성세대와 전통사회의 위기와 함께 교회의 위기가 함께 맞물려 있는 형세가 점점 짙어가고 있다.

젊은 층의 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피할 수 없는 과잉보호가 세계경쟁에 있어서 강한 사회를 만드는 조건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급진사회로 변모하는 사회적 배경에 현대사회로 접어오면서 지식층 사이에 지난 2세기 이상동안 상대주의와 허무주의의 성장과 맑스주의와 과학주의로 상징되는 이론 자체에 선행하는 행동주의 원칙이 문명의 몰락에 항상 관여하였던 향략주의와 쉽게 만나는 정세들이 어디에서나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유들을 묻지 않는 소위 ‘김정은’의 모델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쉽게 들어올 수 있다는 예측이 가능하다. 직업이 없고 소득이 없는데도 젊은이들의 소비력이 대단하다는 현상에서 잘 비취 지고 있다.

행동에 ‘묻지마’가 있고 합리적 이유가 없는 행동들이 집단주의로 쉽게 발전하는 것도 중요한 단서이다. 여기에 지도자가 편승하면 소위 이기적 ‘집단주의’가 발생하고 그 집단에 소외되는 것이 어린 세대들의 두려움이 되고 있다.

지금 현 사회로부터 강하고 독립적인 인물들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유럽으로부터 교육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고 해도 창조적 교육자들의 부재와 같은 그 근본바탕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모델들을 소화할 수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에 필요로 하는 인재들을 길러내는데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위기 앞에서 기성세대가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의 경우, 환경문제도 에너지 문제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석유 에너지에 대한 대체 에너지 기술들도 확보해 놓았고 환경 기술들도 급격히 발전이 되어 미래를 염려할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이나 법률들에 의한 법치사회의 이상은 기성세대의 놀이문화에 불과하고 젊은 세대에게 그 자체로는 그렇게 특별한 관심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종교사회의 이상이나 기독교의 가치는 소수의 경쟁에서 밀러난 자들에게 관심이 있을 정도이고 전도 자체가 무의미해 졌으며 교회 안에서도 기독교 가치와 상관이 없는 집단주의의 현상만이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결국 미래 사회의 전체적 위기에 대해서 기독교만이 그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에서나 사회에서도 창조자와 구속자 하나님에 대해서 응답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고 그들을 통해서 그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에 의해서 풀 수 없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이상한 현상임에 틀림이 없다.

항상 법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나 우주여행에 대한 지루한 관심도 실제로 천국을 기대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유가 없는 과학과 기술 및 사회발전에 대한 관심도 그리스도인에게만 실제적이다. 창조자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신다고 믿고 그 안에만 자연과 그 질서에 대한 그 진실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힉스 입자의 제로 스핀의 의미를 새롭게 물어야 되고 그런 스칼라 장이 소위 중력파의 흔적이라고 하는 스칼라 장과 벡터 장 사이의 텐서의 비율(B-mode)이 0.2로 관찰이 되는 신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다시 묻고 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인명피해에 대한 근본대책이나 그 기술도 아마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이웃사랑에 대한 집념에서 나올 가능성이 높다. 돈을 먹는 밑 빠진 항아리와 같은 정치인들이나 사회 지도자들에 대한 배려나 존중도 아마 참된 기독교인들에게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증거들로서 로마서 12장 이하를 읽어보면 그런 답을 쉽게 얻을 수 있다.

기독교인들의 엄밀한 삶의 길은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 속성들에 대한 신앙에 그 답이 있다. 사도 바울이 신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말씀들을 가장 잘 해석하고 그 모든 말씀들을 가장 잘 꿰뚫어 본 시각이 로마서에 잘 나타났다면, 거기에 하나님에 대한 진실성이 가장 깊은 배경으로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에게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생생한 지식에 대한 감격과 찬양이 로마서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그대로가 지금 현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확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 이런 허무한 사회에 복이 되고 있다고 해야 될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하나님의 진실성에 대해서 감추거나 포기하면, 그 만큼 그 사회가 불행하고 자신들도 불행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더 좋은 것의 포기나 집단적 이기주의가 잠시 안식처가 될 수 있을는지 모르나, 그런 안식은 길지 않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다. 물론 그 확실한 증거는 백년이나 천년이 지나도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것이 답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에는 과학적 역사적 오류가 없고 하나님에게는 자신의 진실성이 그 바탕이라고 믿는 것은 그냥 믿음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과학과 기술에 관심이 없는 것도 실제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모든 이들과 만물의 하나님으로 실제로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그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람들은 포기하고 시대들도 포기하여도 하나님은 그 진실성을 포기하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이 이 세계에 대한 신비와 보증으로 있다고 해야 될 것이다.

한 개인의 삶이나 인류의 삶 전체가 그런 사실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있다는 것이 필자의 진정한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