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교육의 목적과 그 유용성_손재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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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교리 교육의 목적과 그 유용성

<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

 

 

 

시작하는 말

 

오늘날 우리가 속한 교회의 현실 중 하나는 ‘역사적으로 이어져 오던 교회’와 단절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사실 교회라는 것, 그리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져 온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과 역사의 전통을 통해 그 정통성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No History No Faith.

그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교회와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한국교회를 가리켜 말하기를 ‘별종의 기독교’요 ‘아류의 기독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현시대의 교회가 세계교회의 큰 흐름, 즉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교회의 흐름, 끊임없이 이어져 온 교회의 정통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적이고 역사적이며 보편적인 정통교회의 흐름에 떠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통과 보편에서 벗어난 수많은 요소 가운데 하나는 바로 교리가 사라진 교회의 현실입니다. 교리라고 하는 것은 2000년 전의 교회와 1000년 전의 교회, 지금의 교회와 그리고 앞으로 오게 될 교회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사라진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1. 교리에 대한 무관심이 나타난 이유

 

교리에 대한 무관심은 다음의 2가지에 기인합니다.

첫째, 17세기 중엽부터 나타나는 계몽주의와 경건주의의 영향입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이후 인간의 이성을 사물에 대한 인식과 판단의 근거요 척도로 생각하는 사상인 계몽주의가 교회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전통과 역사를 중요시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을 편견 없이 배우고 따른다는 사상인 경건주의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여파로 교리의 중요성이 약화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19세기말과 20세기부터 들어온 이상한 생각, 즉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기만 한다면 무엇을 믿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이 들어온 것입니다. 특별히 이것은 교리가 사라진 가장 중요한 원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미국에서 행동주의나 실용주의와 맞물려서 우리가 만약 주님의 일에 분주하기만 하다면 우리가 무엇을 믿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영향이 얼마나 잘 나타나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상당수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주제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인가? 교회를 위해서 어떻게 수고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입니다. 또한 사람의 경험에 관한 설교와 윤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설교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1. 교리를 강조하는 개혁교회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교리교육을 강조하고 그 전통을 이어오는 교회들이 있으니, 그런 교회들 중의 한 부류를 ‘개혁교회’라고 부릅니다. 역사상 존재해 왔던 그리고 현재 존재하는 개혁교회는 교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흐름은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루터와 같은 사람에게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소요리문답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이 원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루터의 소요리문답(1529)도 있습니다. 칼뱅 같은 사람에게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칼뱅은 “교리가 없이는 교회 자체가 존재한 일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루터와 칼뱅의 전통 위에 서 있는 개혁주의 교회들.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고, 귀한 유산으로 생각하는 개혁교회들은 지금도 교리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1. 교리를 배우는 목적

 

어떤 사람은 “성경만 배우면 되지 교리를 무엇하려고 배우나? 하나님이 성경을 주셨지 교리를 주신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고 질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어떻게 보면 그럴듯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 질문의 내면에는 성경에 대한 경외심이 가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 질문은 썩 좋은 질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의 3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성경 계시 기록 방식과 인간의 사고 체계 간의 차이

첫째, 성경 계시 기록 방식의 독특성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실 때에 교리적 체계로 주지 않으시고 성경 계시의 독특한 방식, 특히 ‘역사’라고 하는 틀 속에서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왜 성경이 이렇게 어렵게 기록되어 있는가? 그냥 간단하게 하나님은 누구시다. 예수님은 누구시다. 교회는 무엇이다. 목사 장로는 무엇이다. 라는 식으로 일종의 선언적 진술로 기록되어 있다면 참 좋을 텐데”라는 식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역사’ 속에 담아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매우 독특한 형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의도적으로 인간에게 너무나 친숙한 삶의 틀인 ‘역사’,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들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과 찬송과 소망으로 응답하여 동참하게 하신 역사를 기록하심으로서 관념화(觀念化)나 개념체계(槪念體系)로서는 담을 수 없는 중요한 것들을 함축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이 일종의 역사 서술이라는 형식을 사용하셨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성경 속에서 진리의 다양한 면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하게 선언적 진술로 주셨다면, 즉 개념체계(槪念體系)나 관념화(觀念化)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면, 한편으로는 성경의 기록이 엄청나게 많아야 할 것이고 또 한편으로 성경은 아주 제한적일 것입니다.

부연설명하면, 풍요로운 하나님에 대해서 일일이 기록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해 버린다면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제한된 표현 속에 가두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경과 관련해 쓰여진 수많은 책들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풍요로우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기 위한 방법으로 ‘역사’라는 틀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기에는 ‘역사’라는 틀이야 말로 풍성하게 당신의 뜻을 나타내실 아주 적합한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우리의 사고 틀에서 이해함에 있어서 ‘일종의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관념화나 개념체계의 틀입니다.

예를 들어, ‘성육신’이라고 하는 주제, 사실 이것이 우리가 명확하게 알고 싶어하는 개념체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습니다. 히브리서에도 있고, 구약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골고루 퍼져 있는 것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본문의 흐름을 따라 하나님의 계시를 배울 뿐 아니라, 교리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잘 알았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성경’만 가르치기보다, 그 성경에서 말하는 관념체계, 개념체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고 노력하였으니 그 결과물이 바로 벨기에 신앙고백서와 같은 교리서들이며, 그것을 가르치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들은 오전에는 성경전체의 본문에 대한 연속적 강해를, 오후에는 교리를 배워왔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오후예배’라고 하는 전통 자체가 그러한 맥락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역사적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를 계승하는 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2) 하나의 교회라는 관점에서 교리의 필요성

둘째, ‘하나의 교회’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입니다. 즉 믿는 바에 있어서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앙고백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 교회에서 서로 믿는 바가 다르다면 사실상 한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교회’라고 하는 것의 정의를 자꾸만 눈에 보이는 형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고백이 서로 다르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0은 이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여기에서 말하는 ‘같은’이라는 말, ‘합하라’라는 말이 모두 다 교회의 ‘고백적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동일한 신앙고백, 하나의 교리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리를 통해 진리 안에서의 하나됨이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또한 이러한 하나됨은 공시적(公示的)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통시적(通時的) 관점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지금 현재 우리의 교회가 하나일 뿐만 아니라, 2000년 전의 교회와 지금 우리의 교회가 하나여야 하는 것입니다.

공교회적 보편성이 없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보편적이라 불려지는데, 땅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세상에 두루 퍼져 있고, 우리가 알아야 하는 가시적이고 불가시적이며, 천상적이고 지상적인 모든 것에 관한 하나의 교리를 보편적이고 완전하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시작부터 신앙고백을 갖고 있었고, 교회의 시작 자체가 신앙고백에 근거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고, 그에 대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대답에 기초해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사도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3)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측면에서

세 번째로, 교리의 당위성은 성령 하나님이 교리를 우리에게 전수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나는 교리가 필요없다. 난 성경대로만 살테다”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경건한 것 같지만 오히려 성령님의 역사를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이 세대의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 혹은 한 명의 설교자가 설교 중 성경을 풀이 할 때만 일하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선물을 교회에 수천 년간 주셨습니다. 그 동안에 여러 교회와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이 성경을 더 잘 이해토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수천 년 간 교회에 보존해 주신 이 교리를 무시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1. 교리교육의 유용함

 

첫째, 성경 전체를 보는 안목을 길러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서는 쉽게 설명해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만큼 수많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성도들만큼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경우도 흔치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대해서 말해 보라고 하면,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해서 말해 보라고 하면 전혀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이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위한 최소한도의 지식에 만족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교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책 자체를 열심히 공부해서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 성경을 모두 다 배우는 것은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 대신 성경의 전체를 보도록 하고, 성경 전체를 요약해 주고 있는 교리를 배우면 성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둘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에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을 보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야고보서에서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분명히 로마서에는 우리가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을 행함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교리입니다. 교리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잘 조화해서 정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교회의 하나됨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하나의 고백으로 뭉쳐져야 할 신앙고백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교회가 하나의 교리를 배우는 것은 이것을 실현케 해 줍니다.

넷째, 이단을 방지해 줍니다(엡 4:14). 사람들이 이단으로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 모르니까 잘못된 교리에도 쉽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또는 자기가 속한 교회에서 성경을 잘 안 가르쳐 주니까 상대적으로 뭔가를 가르쳐 주는 이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세 번째에서 파생되는 유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은 다른 교리에 빠지는 것을 막아줍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면 교회 안에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많아지게 됩니다.

다섯째, 신앙의 상속(相續)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중 하나, 복음이란 대대로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즉 상속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상속이라는 것이 바로 교리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섯째, 복음전파에 유익을 줍니다(벧전 3:15).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를 모르니까 남한테도 가르쳐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리를 배우면 우리가 믿는 바를 분명히 알고 고백하게 되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담대히 증거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일곱째, 신앙의 성장과 확신에 도움을 줍니다(딤후 3:14).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알면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우리의 믿음에 확신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마치는 말

 

교리를 배우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어떠한 상태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며, 또 자신이 무엇을 행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는지를 철저히 깨달음으로써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껏 찬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는 모든 성도가 신학자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교리를 배우는 것은 필연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