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성령으로 난 사람
류성민 목사(성가교회, 합신 강사)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리신다. 이 부르심은 듣는 사람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면 구원을 얻고,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복음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 다만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비밀이다. 우리는 그저 성경과 경험을 통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오늘 나눌 주제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내용, 즉 중생이다.
성경은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렀다고 선언한다(롬 5:12). 그런데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죄 용서를 받아 죄로부터 해방되었고,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롬 6:17-23).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다시 살아남” 곧 중생이라고 부른다. 성경에서 중생은 자주 넓은 의미에서 거의 구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장의 거듭남은 구원의 전체 과정을 포함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신학적 논의에서 중생은 상당히 좁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구원의 순서를 설명할 때 중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 순간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설교나 대화에서 중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들을 때, 그것이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었는지, 좁은 의미에서 사용되었는지 분별하지 않으면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오늘 논의는 좁은 의미에서, 즉 ‘새 생명의 탄생 순간’이라는 중생의 의미를 다룰 것이다.
중생은 좁은 의미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 순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예정하셨다. 성경은 택함받은 사람들이 복음 선포를 듣고 이를 믿고 받아들이면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친다(롬 10:10). 그러나 정작 죄로 죽은 영혼은 복음의 선포를 외적으로 들을 수 있을 뿐이지 진실한 의미는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구원이 시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경험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의 영혼에 본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려면 먼저 그 영혼이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영혼을 살리는 사역은 죽은 상태인 사람에게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 없다. 이는 오직 사람의 외부에서 발생하는 사역, 즉 성령님의 사역이다. 성령님은 선포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 복음의 선포를 영적으로 들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 생명을 ‘영적 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개인에게 경험적으로 적용되는 시작, 즉 중생이다.
중생을 좀 더 세분해서 발생(generation)과 출생(bearing)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발생은 생명이 생겨난 자체를 가리킨다. 생명이 생겨나기 전에는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는데, 하나님의 살리시는 사역을 통해 생명이 생겨났다. 하나님의 이 사역은 사람의 인지와 이해와 감각을 넘어선다. 사람은 발생의 순간을 알 수 없다. 그저 수동적으로 자신에게 죽었었고, 이제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발생이다. 그리고 발생을 통해 생명을 소유한 영혼은 자신의 살아있는 상태를 인식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생명을 인지하고, 이해하며, 감각하며, 생명으로 인한 욕구를 갖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매우 능동적이며 주도적이며 의지적이다. 생명이 경험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것이 출생이다.
이렇게 발생과 출생으로 설명될 수 있는 중생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중생을 경험하는 가운데 수동적이지 않고, 영적 생명을 소유한 사람으로 적극적으로 생명을 인지하고 원한다. 구원론적 이단들 가운데 중생의 발생과 출생을 잘못 이해한 이들이 있다. 새로운 생명을 만들거나 유지하는 주체를 사람으로 본다. 이는 옳지 않다. 죽은 상태에서 스스로 살아나는 것도 불가능하고 생명의 상태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인데, 하나님과 상관없이 생명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도 우리의 경험과 모순된다. 우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으로 생명을 얻고,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그렇다고 사람의 반응이 기계적이고 수동적이지도 않다. 하나님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지식과 욕구에 있어 항상 하나님을 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주도적이며 적극적이며 자발적이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적 사실이다.
부르심과 관계하여 중생의 발생과 출생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구원의 진리를 담은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받을 사람을 부른다. 그러나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생명의 반응을 할 수 없다. 죽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사람은 그 말씀에 적절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말씀을 듣는다는 의미에서 중생을 ‘들을 귀’ 혹은 ‘영적 귀’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귀가 없다. 듣지 못하니 반응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사람이 예상하지 못 하는 가운데 영적 생명, 즉 들을 귀를 딱하고 붙여주셨다. 그러면 이제 그는 복음의 참된 내용을 듣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들리게 된다. 더하여 그는 생명의 반응으로 말씀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향한 추구와 욕구가 생겨난다. 특히 성령님께서 들을 귀를 주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영적 귀에 선포되는 ‘내적 부르심’이라 부르고, 더하여 생명의 반응이라는 필연적 효과를 갖기 때문에 ‘효과적 부르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 중생에 대한 내용을 중생의 세 가지 구성요소를 논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중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부르심, 즉 하나님 말씀의 선포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시작과 과정과 완성을 위해 말씀을 전파하도록 하셨고,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배우고 묵상함으로 중생에 참여하고 구원을 완성하게 된다. 둘째, 성령님이 필요하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귀’를 만들어 주신다. 발생이라 불리는 사건을 통해 영적 생명이 생기고, 구원의 구체적인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이 일은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셋째, 사람의 반응하는 의지이다. 성령님을 통해 영적 생명을 가진 사람은 그 생명을 인식하고 생명의 욕구를 갖게 된다. 이는 성령님의 사역과 동시에 사람의 동작이요, 반응이요, 사역이다. 생명의 인식과 욕구를 가진 사람은 매우 적극적이며 주도적이며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 회심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사역과 사람의 반응으로 구성된다고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사람의 반응하는 의지를 중생의 원인이나 구성요소라고 말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생이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해서 사람의 역할이나 기능이 전혀 없는 기계적인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령님의 사역으로 생명을 가진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에 매우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구원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사람의 적극적인 반응이라는 필연적 결과로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진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을 인지하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생한 사람의 당연한 결과인 거룩을 향한 적극성과 능동성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