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채연진 집사 (예수비전교회)
오빠가 못다 피운 인생의 여러 가지 꽃이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어릴 때 우리 할머니는 부엌이나 장독대 등에 물을 떠다 놓고 빌기를 자주 하셨다. 아마도 가족들의 건강이나 농사 잘 되기를 아니면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이 잘 자라서 더 부자가 되기를 비셨던 것 같다. 연초에는 점을 치는 아주머니가 집에 와서 우리 식구들 생일을 다 물어보고 복이 있느니 뭘 조심해야 한다느니 그런 얘기를 많이 했고 어머니는 그 말을 꼭 믿고 우리들을 조심시키곤 했다.
우리 집은 시골 중에서도 시골이라 어릴 때까지 전기가 없어서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하던 할머니가 기억에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어딜 가나 미신이었고 어디를 봐도 갖다 붙인 신이 많았다. 그랬던 우리 가족이 교회를 다니게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누구도 어떻게도 예측할 수 없으며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내가 고2 여름 방학 때 정확히 7월 말이었을 것이다. 벌써 30년도 더 지났는데 어제 일처럼 뚜렷하고 그 날을 기억하면 아직도 가슴 한편이 서늘하고 아리다. 내게는 오빠가 둘, 언니가 셋, 동생이 둘 있었다. 3남 5녀가 우리 형제다. 아버지께서 외아들이라 할머니께서는 많은 손주를 원하셨고 그 덕에 내가 태어날 수 있었으며 엄마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 많은 자식들 공부 가르치느라 허리가 휘게 일하셨다.
원래 어머니는 2남 2녀, 넷만 낳으려 하셨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어쨌든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다 모이면 수저를 12개나 놓아야 했던 다복한 가정이었다. 그랬는데 그해 여름 작은 오빠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하늘나라로 떠났다. 대학 2년을 마치고 군대 다녀와서 가을 학기에 복학하려고 아르바이트 하던 중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 오빠는 그냥 오빠가 아니었고 할아버지께는 그냥 손자가 아니었다. 말 할 것도 없이 엄마에게 있어 작은 오빠는 너무 귀하고 귀한 아들이었다. 아마 일찍 우리 곁을 떠나려고 남들 평생 효도할 것을 그 때까지 다 한 듯싶다.
오빠는 보기 드문 훌륭한 청년이었고 부모에게는 효자였다. 동네 어른들 누구나 칭찬했고 누구나 오빠를 좋아했으며 또한 오빠는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오빠가 하루아침에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우리 가족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고 부모님과 할아버지의 충격은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오빠가 소천하기 전 4주 동안 교회를 다녔다. 군대 있을 때도 본인은 법당파라고 했던 오빠가 교회를 다닌 것이다.
그 날로 우리 집은 대대로 기독교를 믿은 집안처럼 단숨에 변해버렸다. 제사도 없애고 미신도 다 버리고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중에 오빠를 만나려면 오빠가 믿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셨던 어머니의 뜻을 친척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도 교회를 나가시게 되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단번에 우리 가족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오빠는 우리 가족을 그렇게 전도하고 떠난 것이다. 할아버지도 그 몇 달 후 하늘나라로 가셨고 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장례예배를 드리셨다. 지금 생각하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제 90이 다 되신 어머니는 거동이 불편해 교회를 가실 수 없지만 예배드리기를 기뻐하시며 젊을 때 예수님을 믿었다면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고 더 좋았을 거라고 아쉬워하신다.
나이 들었어도 여전히 오빠가 생각나고 그립다. 가슴에 묻고 사신 엄마의 심정은 어떠실까? 그리스도인으로 더 잘 살아야 하는 사명감을 느낀다. 오빠가 못다 피운 인생의 여러 가지 꽃이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우리 아들이 그때 오빠보다 한 살이 더 많다. 코로나19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진 요즘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을 더 가까이 뵈옵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들이 참으로 넘쳐나는 것을 느낀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말고 이럴 때일수록 더욱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백성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우리 오빠는 우리 가족 구원을 위해 먼저 가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