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교회가 완전의 푯대를 향해 가질 태도
장로교회의 성도들은 예배와 정치와 교제와 생활을 성경과 그에 근거한 신앙고백 그리고 성경의 원리와 목적에 부합한 질서 안에서 영위한다. 칼빈은 교회에 얼굴이 있다면서 교회의 표지를 강조했다. 교회의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고 그에 의존된 성례와 권징이 추가된다. 이것이 교회가 추구하고 나아갈 푯대이다. 이 푯대의 참 의미와 부르심을 추구하는 이들에겐 중요한 태도가 있다. 특히 개혁신앙, 장로교 정신을 따르는 교회 안에 다음과 같은 의문과 논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신학과 신앙이 제시하는 푯대가 너무 높아 따라가기 버겁다는 것이다. 누군가 이 푯대에 도달했다는 자의식에 의해 때로는 타인에 대한 비판의식과 정죄의 오만에 빠지기 쉽다는 정서이다. 혹자는 개혁신학과 신앙은 도달 불가한 의식에서나 존재하는 이상일 뿐이라, 현장 목회에는 유익이 없고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관한 두 가지 반응이 있다. 첫째, 개혁신학을 현실 목회에서 포기하거나 다른 것과 타협하는 자세. 둘째, 개혁신학의 이상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며, 자신들 기준에 못 미치는 교회를 비난, 정죄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한편은 좌절과 타협, 다른 한편은 교만과 정죄의 오만이다.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런 두 위험에 빠져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두 늪을 어떻게 대처해 건전한 개혁신학과 신앙과 목회를 추구할 수 있을까. 필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개혁교회들이 고백했던 고백서들에 이러한 난관을 잘 대처할 원리와 지혜가 담겨 있다고 확신한다.
개혁주의의 출발점과 우리의 자의식이 중요하다. 칼빈은 교회의 출발점을 하나님의 용서로 보았다. 교회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여죄가 있고 연약한 자들의 연합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토대 위에 존재한다. 따라서 교회는 겸손해야 한다(Inst. IV. 1. 20-21). 개혁신학은 완전주의(perfectionism)을 이단시해 왔다. 교회의 표지를 도덕성이 아닌 성경에 두었다.
또한 신앙고백들에 표명된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해도 동일하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2문에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인정될 수 있는 의인들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모든 측면에서 일치해야만 하는데, 이생에서 우리의 가장 훌륭한 행위도 불완전하고 죄로 더러워져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고백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XVI. 5.)과 벨직 신앙고백서(15.)에서도 메아리친다. 칼빈도 “우리의 불완전함(imperfection)의 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가장 훌륭한 행위도 여전히 항상 어떤 육의 불결(impurity)로 얼룩지고 부패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어떤 찌꺼기가 그것(선행)에 섞인다는 것이다(Calvin, Institutues, III. xiv. 9.).”
이런 정신을 토대로 개혁주의 신앙과 목회를 어떻게 영위할 것인가? 첫째, 거듭난 성도들로서 교회를 이루지만, 여죄의 죄인이란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더 성숙한 신앙과 덜 성숙한 신앙이 상대적으로 존재하나 완전이란 없다. 둘째, 그러므로 죄 사함의 은혜로 존재하기에 불완전하나 용서 안에서 목표를 향해 걸어갈 수 있다. 이 두 인식으로 개혁신학은 오만이나 정죄의 폐해에 빠지지 않는 유익을 얻는다.
셋째는 좌절이나 타협에 매몰되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항목이다. 우리에게 완전의 푯대가 필요한 이유는 그곳이 교회와 성도가 종말에 도달할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도달 못할 종말적 성취와 함께 도달할 목표이다. 이 푯대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혹은 신앙고백 그리고 교회의 질서가 추구할 이상을 버리라 않고 오히려 연약함 속에서 그것을 추구하라 명령하신다. 왜냐면 우리가 연약하고 죄성으로 가득하기에 말씀과 신앙고백과 교회의 질서가 더욱 절실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타협이나 오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과 그에 준한 예배와 삶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죄인들로서 모여 죄 사함에 의존해 하나님의 말씀의 푯대를 향해 걸어가는 복을 받은 자들이다. 개혁신앙이 추구하는 말씀과 신앙고백과 교회의 질서들은 우리가 연약하고 죄의 영향력 아래 있기에 더 절실하고 유익하다. 죄 사함 안에서 진력 추구하고, 그것에 못 미칠 때 회개하며 나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본분이며 구속적 복의 누림이다. 타협과 좌절과 정죄를 넘어 개혁신학이 연약한 교회와 성도들이 바로 서고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구심점이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