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계절 특집]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 벌』 읽기 (4) _이원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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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 벌』 읽기 (4) (최종회)

로쟈 이야기를 통해 선사한 ‘죄와 벌 그리고 빛’이라는 한 편의 장엄한 드라마

* 모든 인용은 출판사의 허락을 받고 열린책들 판 <죄와 벌>에서 했다 – 필자 주

이원평 목사(춘천돋움교회)

 

내가 만난, 내게 다가온 도스토예프스키

1997년, 군 제대 후에야 겨우 입학할 수 있었던 신학부, 조금 황량한 캠퍼스 주변의 분위기, 게다가 아직 물러나지 않은 지난겨울의 쌀쌀함이 제법 남아 입학생의 설렘을 가라앉히던 첫 봄 학기 첫 금요일 오후, 학생들은 주말을 맞아 대부분 빠져나갔고 복도 불마저 꺼진 반지하 기숙사 안쪽 끝의 내 방, 그때 그곳은 오직 나만의 공간이었다. 집이 멀었던 나는 그곳에서 약간의 쓸쓸함을 곱씹으며 홍신사판 노랑색 표지(?)의 「죄와 벌」을 넘기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때 나는 「죄와 벌」이라는 소설의 작가 이름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래도 ‘문학의 이해’라는 교양수업의 과제로 선택한 러시아문학은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겨주었다. 구체적으로 깊이 다가온 것은 ‘로쟈’(라스콜리니코프)라는 캐릭터였다. 그가 내뿜던 한숨, 그 속에 담긴 답답함과 비통함, 상황이 그에게 가져다 준 분노와 허탈감, 그의 끝 모를 방황과 불안 같은 것이 나를 그에게로 몰입시켰다.

그러면 나는 로쟈에게서 왜 그토록 진한 동질감을 느꼈던 것일까? 고백하건대, 그것은 신학부에 입학하기 전 겪은 비참하고 비루한 내 실존의 경험 때문이었다. 대략 중3부터 스물다섯에 군을 제대하기까지의 10여년 정도, 청소년 시기를 말하기도 부끄러운 방탕 속에서 뒹굴었다. 쌍둥이 동생이 고등학교를 먼저 졸업한 다음에 다시 입학했다!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잘했던 나는 더 잘해보겠다며 부모님을 설득해 양양군에서 강릉시로 유학을 떠났다.

고1이었던 그해 3월, 등교를 위해 외할머니 댁에서 버스에 올랐던 나는 갑자기 가출을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길로 터미널로 내달아 먼저 가출한 친구 녀석에게 들었던 상봉터미널행 버스를 잡아탔다. 그리고 물어물어 청량리까지 기어들어갔다. 여관에서 자는 게 겁이 났던 그날 밤엔 청량리 역전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잤다. 신문 등을 구해서 쪼그려 잤는데, 그래도 잘만 했다. 다음날 아침 해가 떠서 눈을 떴을 때 길 건너 2층에 있는 커다란 만화방 간판이 들어왔다. 그렇게 만화방에서 며칠을 보낸 후 드디어 동대문의 양복공장에 취직했다. 부푼 꿈에 첫월급만 손꼽아 기다리던 나는 그날 나이트클럽에서 월급을 통째 날려먹었다. 아무 것도 몰랐던 촌놈이 소줏값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줄 알고 그 많던 맥주 값을 다 내겠다며 큰소리쳤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출근길, 주머니에는 딸랑 천 원짜리 한 장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시 창신동에서 동대문 평화상가로 가던 출근길 옆에는 리어카를 펼쳐 놓고 식빵에 계란부침을 얹어 팔던 아주머니들이 많이 계셨다. 배고프고 속도 쓰렸던 나는 주머니를 뒤졌지만 한 개 천 원 하던 계란식빵을 사먹을 돈이 없었다. 순간 얼마나 서러웠던지 눈물이 핑 돌았다! 별 수 없이 공장까지 터벅터벅 걸어가서 제단사였던 돌석 형님(이름이 진짜로 ‘돌석’이었다!)께 ‘어제 내가 술값도 내고 했으니 천 원만 달라’고 해서 계란식빵을 하나 사먹었다. 꿀맛이었다!

처음에는 잡일 ‘시다바리’만 하다가 곧 재봉사 아줌마 앞에 다소곳이 앉은 ‘시다’가 되었다. 재봉틀 돌리는 솜씨가 조금 있었던지, 그 ‘오야 아줌마’는 내가 마음에 든다며 곧 주머니와 ‘우라’에 오바르크를 치고 다림질도 하도록 맡겨 주셨다. 이후에 가방공장으로 옮겼다가 명동의 호프집, 경양식집, 나이트클럽 등으로 전전했다. 경양식집에서 서빙할 때는 번듯한 함박스테이크를 시켜 예쁜 아가씨랑 데이트하며 먹어보는 것이 꿈에도 소원이었고, 맥줏집에서 일할 때는 고급 안주에 500cc를 시원하게 들이켜는 사람들을 보며 정말 부러워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 곳에서 천만다행스럽게도 마약이나 다른 추악한 범죄에는 손대지 않았다. 고향에서 통곡하며 기도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교회 권사님들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지켜주셨기 때문이리라! 지금 생각해도 등줄기가 오싹해 온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청소년기에 해서는 안 될 몹쓸 짓들을 많이 저질렀다. 주님께 회개하고 결혼하기 전 아내 앞에서도 다 고백했지만, 그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히 괴롭다! 어느 순간 그때 일이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을 치며 무릎을 꿇게 될 때가 지금까지 있다.

그땐 항상 주머니가 쪼들렸다. 월급을 타면 거의 며칠 만에 손가락을 빨곤 했다. 그래서 돈을 훔치고 싶은 유혹에 종종 시달렸다. 부끄럽지만, 그랬던 적도 있다. 내 맘껏 돈을 쓰며 즐기고 싶었다. 나중에 신학교에 입학해 3학년 때 결혼을 한 직후 크게 회개할 계기가 있었는데, 그분들 중에서 기억이 나고 찾아갈 수 있던 모든 분들께는 직접 찾아가 사죄를 드렸다. 아직 동대문 옷공장 뒷골목에서 맛있는 닭곰탕을 하며 우리 공돌이에게 마음씨도 좋게 외상으로 주셨던 그 전라도 아주머니께는 사죄를 못했다. 몇 달은 잘 갚았지만, 옷공장에서 마지막 월급을 타던 밤 짐을 싸 명동으로 날랐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 어르신을 만나면 무릎 꿇고 사죄드리고 싶다! 아, 그분께서 아직 생존해 계실지. 주여, 이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그러니 「죄와 벌」의 로쟈가 내게는 남이 아니었다. 그의 비참함과 허망함, 그의 분노와 불안함, 안락의자에 앉아 남의 이자만 꼬박꼬박 뜯어먹고 사는 전당포 노파의 몇천 루블이라도 강탈해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고 싶은 유혹이 나로서는 십분 이해되었다!

「죄와 벌」은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사상계의 위기와 대도시 하층민들의 문제를 다룬 일종의 사회소설이기도 하다. 동시에 살인죄를 짓고 나락으로 떨어진 한 인간의 뒤틀린 내면과 죄책을 추적한 심리소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인간과 사회의 제반 문제를 다룬 리얼리즘의 정수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이미 충분히 밝혔으니 더 보탤 말은 없다.

그런데 「죄와 벌」은 이렇게 읽힐 수도 있다. 내게는 이 소설이 죄짓고 번민하며 영혼에 지독한 고통을 받던 로쟈에게 임한 빛과 구원의 이야기로도 읽힌다. 물론 ‘빛’과 ‘구원’은 이 소설에서 암시적일 뿐이다. 그러나 소냐가 읽어준 나사로의 부활 장면(제4복음서)과 시베리아에서의 ‘빛’이 없다면 이 소설은 그야말로 혼란과 절망만 남길 것이다. 아마 계속 집어들게 만드는 매력도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장면들 말고도 소설 곳곳에 성경적 상징을 암시해 두었다. 실제로 도스토옙스키 연구자 김정아는 “구조와 숫자의 상징성”을 통해서 이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도 했다. 소냐가 로쟈에게 나사로의 부활을 읽어줄 때, 소냐는 그 복음서를 요한복음이 아닌 “제4복음”으로 일컫는다. 김정아에 의하면, “이 ‘4’라는 숫자는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외관상으로도 소냐와 작가=화자에 의해 반복해서 강조된다…… 성경의 나사로 이야기가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전조인 일련의 사건 중 하나이듯이, 라스콜리니코프가 그 이야기를 읽는 것은 에필로그에서 있게 될 자신의 정신적인 회복과 갱생을 형상화한다. 숫자 4는 이 비유적 연관성의 중심에 놓여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나사로’를 읽는 장면을 4부 4장에 위치시킨 것은 성경의 구조적 상징성과 성경적 숫자의 상징성을 잘 알고 있는 작가의 작품에서 우연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4부 4장에 위치한 죽은 지 4일 만에 발생한 나사로의 부활은, 4라는 숫자를 통해 나사로와 라스콜리니코프의 상징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러니 제3의 읽기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겠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 대가들이 남긴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다. 헤럴드 블룸이 잘 말했듯이 작가도 미처 자신이 남긴 작품의 의미와 그 파생 효과들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열린 결말’을 추구한 작가였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거대한 서사를 풀어나가면서도 한 사람에게 우리의 시선을 집중케 만드는 힘과 집요함이 있다. 그의 가장 큰 매력은 온 인류를 말하면서도 ‘남’이 아닌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곧 ‘로쟈’이면서 동시에 ‘나’는 ‘소냐’나 ‘라주미힌’도 될 수 있다. 그리고 악인 루쥔이나 스비드리가일로프, 비참한 인물 마르멜라도프가 바로 ‘내’ 모습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로쟈를 보며 오열했던 라스콜리니코바는 바로 ‘내 어머니’, 방황하며 죄짓는 아들들을 둔 ‘우리의 어머니’다! 이것이 내가 만난, 내게 다가왔던 도스토예프스키다.

그리고 나는 범죄자 로쟈의 수동성(피동성)과 그가 객체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았다(이 개념들은 번역자인 홍대화 선생의 연구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처음에는 라스콜리니코프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초인 이론에 따라 전당포 노파를 살해할 계획까지 주도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지나자 그는 자기 사상의 노예가 되었고, 끔찍한 살인죄를 ‘필연 적으로’ 저지른다! 그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리자베타의 대화를 듣고 노파가 홀로 있는 시간을 듣게 되는 등 아무리 ‘운명적’이라는 핑계를 댈지라도 이 사실 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초인 사상의 노예가 되어 살인죄를 저지른 로쟈는 더 이상 주체적 인격을 가진 존재로 행동하지 못했다. 그는 죄의 충동에 굴복한 직후부터 객체로 전락했다. 노파와 그녀의 죄 없는 여동생 리자베타까지 살해한 이후 완전히 수동적이 되었다. 이처럼 우리는 주체로서의 자신을 상실하고 불안하게 떠도는 그의 모습에서,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버리는 그의 모습에서, 극도의 신경과민에 빠져 남의 발소리와 대화마저도 모두 자신을 향한 것인 양 벌벌 떠는 모습에서 그가 객체로 전락해 버렸음을 직시하게 된다!

그러면 로쟈는 언제부터 주체로서의 자신을 되찾은 것일까? 그 순간은 소냐에게 살인죄를 자백하고, 경찰서에 자수하러 가기 전 사거리의 대지 위에서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며 입 맞추었던 때이다. 그는 ‘어머니인 대지’ 위에서 자기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한 후 비로소 자신을 되찾아간다. 객체로 전락했던 그가 다시 삶의 온전한 주체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이 삶의 온전한 주체가 된다는 것은 그리 거창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책임하에 정직하게 말하고 행하며, 그럼으로써 자유를 구가하는 삶이다. 곧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삶, 아니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삶이 주체로서의 온전한 삶이다. 과연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체적 인격과 죄를 고백할 수 있는 은혜 그리고 용기를 주신다. 우리는 로쟈가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해 죄를 고백하고 벌도 달게 받으며 삶을 책임지게 되었을 때, 마침내 소냐와 함께 완전한 자유와 부활을 꿈꾸는 것을 본다!
바울 사도가 죄에 인격성을 부여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죄를 짓기 전까지는 우리 자신이 그 일을 주도하는 것 같지만, 죄에 발을 담그고 서서히 그 올무에 빠져들게 되면서부터 주체로서 우리의 삶은 상실된다. 범죄한 이후 우리의 운명은 타의에 의해 좌우된다. 물론 이 사실을 부인할 수도 있고, 늦게 자각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야 인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범죄한 로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양심의 정죄와 악마의 참소와 법의 판단 아래 놓이는 수동적 객체로 떨어질 것은 자명하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들과 분리되고 단절된 채 덩그러니 홀로 남은 자아만 끌어안고 신음할 것이다. 만일 법의 판단을 받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용케 빠져나간다 한들, 종국엔 마찬가지 신세일 뿐이다. 죄에 붙잡힌 삶은 온갖 변명과 은폐, 타인과의 단절로 인해 결국 죽음과 방불한 상태나 다름없게 된다. 죄를 진 채 살아가는 우리의 겉모습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고, 내면은 썩을 대로 썩어 악취에 악취만 사방에 흩뿌릴 것이다. 이 얼마나 불행하고 고달픈 삶인가! 실제 우리 주변의 범죄자들을 보면 주위의 시선과 관심을 기피하고 자아에 갇히는 경향이 짙다. 그리고 그들은 지나치게 수비적이 되어 주변 사람에 대해 공격적 성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로쟈는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 리자베타를 살해하자마자 자신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는 극심한 양심의 정죄와 정신적 고통, 분열에 시달렸다. 어머니와 누이 동생, 친구에게 무심했고 무정하게 대했으며, 매사에 극도로 신경질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는 결국 타인을 살해한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죽인 것”임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로쟈는 타인에 의해 강제되고 자유와 책임을 잃어버린 존재, 즉 주체를 상실한 수동적 객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롬 6:14). 그렇다. 죄는 우리의 인격을 주장하는 습성을 가졌다. 고백하지 않은 우리 안의 죄는 우리에게서 자유와 책임을 빼앗아 우리를 객체로 전락시킨다. 죄는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들어 살았으나 죽은 것 같은 존재로 만든다. 죄는 우리 존재의 활력을 빼앗아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게만 만든다. 그러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 바로 죄다! 로쟈는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함으로써 마침내 주체가 되었다. 우리는 ‘그 로쟈’를 꼭 기억하자! 그렇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로쟈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죄와 벌 그리고 빛’이라는 장엄한 드라마를 한 편 선사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