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신앙| 평면적 인물과 입체적 인물 _ 이동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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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신앙

 

평면적 인물과 입체적 인물

 

<이동만 목사 | 대구 약수교회>

 

사람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때,

우리 자신이나 타인도 더 많이 용납할 수 있다

 

목사님들과 사무엘서를 공부하면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논의를 하다가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내용이 문득 생각났다.

고대 소설과 현대 소설의 차이 중에 하나는 인물을 어떻게 묘사하느냐는 것이다. 고대 소설에서는 인물을 묘사할 때 성격을 평면적으로 다루고, 현대 소설은 입체적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고대 소설의 인물은 착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착하고, 악한 사람은 시종일관 악하게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소설에서는 어느 때는 착하게 행동하고, 어떤 때는 악하게 행동하기도 하는 인물을 그려낸다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을 소개할 때 현대 소설식으로 하고 있다. 그 어느 사람도 늘 착하거나 악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고대 소설식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자기가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 경우는 그 사람이 뭔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변호하려고 애쓰고,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우 괜찮은 행동을 해도 진심이 아닐 거라는 등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우리는 사람이 본래 늘 똑같은 모습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실제 우리와 같은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 성전 낙성식에서 한 기도를 보면 참으로 신앙이 좋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말년의 그의 모습은 많은 처첩을 맞아들임으로써 우상숭배의 문을 활짝 여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두 모습이 같은 솔로몬인가 싶지만 동일한 솔로몬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솔로몬, 솔로몬 한다.

세례 요한의 경우,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2,3)라는 질문을 한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의심이 생긴 것같이 보인다. 그런데 평면적으로 보면 훌륭한 세례 요한이 그럴 리가 없다고 하여 세례 요한 자신의 의심 때문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하여 한 것이라 해석한다(칼빈, 크리소스톰). 훌륭한 분들의 주석이지만 이와 다르게 세례 요한 자신의 의심이라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자연스럽다. 예수님의 대답을 전해 듣고 세례 요한은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성경은 그 어느 사람도 완벽하다고 기록하지 않는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 모세, 다윗 등이 다 그렇다.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을 보면 그렇고 그런 오히려 평균적인 가정보다 복잡하고 문제가 많은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성경의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때 그 사람을 보다 잘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약함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강하다 하더라도 자랑하지 못한다. 그래서 위선을 떨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나의 약함을 다른 이들의 강함으로 채워 주시고, 나의 강함으로 다른 이들은 세워 가게 하신다.

박영선 목사님이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에서 거듭거듭 강조하는 말씀은, 소위 성경의 위인들이 그들 자신이 얼마나 훌륭해서 하나님께서 쓰셨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열심을 가지시고 이들을 만들어 가셨는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열왕의 역사를 통해서 확인하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 왕들과 대통령들과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도(「미국인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서 볼 때) 허물이 없는 자가 없다. 겉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포장된 경우가 아주 많다.

우리가 우리와 다른 사람을 평면적으로가 아니라 입체적으로 바라볼 때, 우리 자신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고, 다른 이들을 더 많이 용납할 수 있다. 내가 인생의 여정에서 이런저런 일을 만나고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것처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보다 넓은 가슴으로 배려와 관용이 넘치는 넉넉한 성도로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