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신 고신 연합 이슬람 세미나 _제1강 |
변증과 정치신학 사이에서 :
‘볼프의 하나님’에 대한 비판적 고찰 (1)
<김재윤 교수 |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 지난 11월 18일 합신 다종교문제연구위원회가 주관한 ‘합신 고신 연합 이슬람 세미나’의 강의 중 제1강을 2회 분재한다 _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I. 칼빈의 신론
II. 바울과 스토아 철학의 신
III. ‘알지 못하는’
IV. 하나의 본질 vs. 세 주체들
“칼빈의 관점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이 ‘공통의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사실상 없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스토아적인 아라투스의 시에서 언급한 신이 하나님과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삼위 하나님만이 공통의 신에 대한 강론으로 바울이 알게 하고자 하는 최종적인 그 하나님이다”
I. 칼빈의 신론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언약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어떤 분이 되어 주시는가 하는데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 혹은 본성을 묻는 질문(Quis sit Deus)과 우리를 향해서 어떤 분인가 하는 질문(Qualis sit Deus)을 날카롭게 대비시키면서(기독교강요 I, 2. 2) 전자의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그 분의 본성(Deus in se)을 아는 것 대신에 우리를 위해서 어떤 분이 되길 뜻하시는가를 알아야 한다(Neque enig scire quis in se sit, tantum nostra refert, sed qualis esse nobis velit. 기독교강요 III. 2. 6). 그분의 본질(essentia)을 무모한 호기심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시도 대신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신 것을 따라서 그분의 일을 묵상해야 한다. 바로 우리 옆에, 친밀하게 구원하시며 우리와 교제하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되어야 한다(기독교 강요, I. 5.9).
이런 칼빈의 생각은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단지 그 분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배제한다. 대신 오직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안에서 하나님을 말하는 신학으로 자연스럽게 우리를 인도한다.
교황주의자들과 그들의 신학자들은 믿음의 대상을 재잘거리면서 그리스도에게 주목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말하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부끄러워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불가해한 신성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그러나 믿음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늘에 도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낮아지시고 모욕당하신 하나님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기초를 찾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확신을 얻지 못할 것이다. (칼빈, 요한복음 주석, 14장)
계속해서 칼빈은 그리스도와 분리된 모든 신학은 헛되고 혼란한 것일 뿐 아니라 그럴싸하지만 속이며 정신 나간 것이라고 비난한다. 오직 그리스도로만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의 결과로 멍청한 사변들로 빠져들어가며 (그리스도 없이 그 분 밖에서) 그들 스스로의 하나님만을 찾는 것은 복음에 전혀 진전이 없다. 결론적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안에서만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한한 선함이 나타날 뿐이다(칼빈, 요한복음 14장 주석).
하나님에 대한 묵상과 예배에서 나타나는 칼빈의 신론은 우리에게 결코 하나님의 본질-질문에서 출발해서 안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곧바로 우리를 위해서 어떤 분이 되어 주시는가가 되어야 하며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으로 아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 질문은 곧 우리 구원에 대한 질문이며 이 둘을 서로 분리할 수 없다.1)
나아가 칼빈의 이런 근본적인 방향성을 따르자면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 지식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칼빈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지식만이 올바른 것이었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 질문에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이런 측면들을 고려한다면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른 종교의 신을 ‘같은 신’으로 말할 수 있는 공간은 매우 좁아진다. 관심의 초점을 좁혀서 지금 우리가 당면한 과제인 ‘이슬람의 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밝힌 칼빈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이 ‘공통의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사실상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전통에서는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나타난 신을 기독교 신앙이 고백하는 하나님과 연결하며 이를 같은 하나님으로 말하고자 하는 ‘공통의 신’ 담론이 전혀 부재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각도에서 보자면 오히려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은 이 점에서 열려 있었다. 문제는 어떤 동기와 목적을 통해서 이런 열려 있음이 실현되었는지가 좀 더 입체적으로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II. 바울과 스토아 철학의 신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첫 설교는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향했다(행 13:16-41). 당연히 그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부르면서 조상들과 함께 했고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신 분임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바울은 같은 설교에서 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알려주셨음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은 이제 새로운 방식인 예수를 일으키고 살려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시는 것으로 실현되었다(행 13:32,37). 이 설교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믿어왔던 바로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부활시키고 썩지 않게 하신 분과 동일한 분임을 확인한다. 다만 이 동일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예수를 구원자로 보내시는 분(23절)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모세의 율법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자들이 이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새로운 길을 여셨다(39절).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치고 행한 강설은 앞선 회당 강론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바울은 자신과 바나바를 신들이라고 여기는 자들을 향해서 자신들은 그들 인간들과 동일본성(oJmoiopaqh;?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이 믿는 신들은 모두 헛된 것들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살아계신 하나님 곧,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만이 참된 하나님이시다. 루스드라 사람들의 반응에서 나타난 신화적 다신교의 신들은 헛된 것들이며 이런 신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이 짧은 강론의 마무리에서는 이들이 알고 있는 신과 같은 신에 대해서 짧게 언급한다. 비, 결실기, 음식, 기쁨은 당시 이방인들이 누리는 추수축제와 연관된 것이다(행 14:17). 그것은 하늘로부터 왔다. 살아 계신 신은 하늘에 계신다. 신은 하늘에 계시면서 좋은 것들을 주신다. 바울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키케로의 다음 글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신이 사실상 동시대 이방인들이 생각하던 신에 대한 생각, 특히 스토아 철학의 신과 상당히 겹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늘은 빛나고 나무들은 잎들을 얻어간다. 가지들은 활기차게 만드는 잎들로 덮여지고 굵은 가지들은 열매들이 많아서 휘어지네. 곡식들은 추수의 모든 것이 피어난다. 샘물들은 흘러 넘치고 들판의 풀들도 옷 입는다. 이것들은 수많은 소들의 먹이를 제공하거나 또 들판의 농사를 위해서 또 일부는 운송되고 일부는 옷을 만드는 재료로 쓰여진다. 사람뿐 아니라 하늘을 생각하고 신들에게 경배하며 사람이 유용하게 이용하도록 들판과 바다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가 모든 이런 것들과 셀 수 없는 많은 다른 것들을 볼 때 우리는 그것들을 가져온 어떤 이(창조주)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플라톤이 말했듯이 이 모든 것들이 낳음을 받았거나 아니면 늘 그대로 있었던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듯 어떤 통치자의 건설의 일이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Marcus Tullius Cicero, Tusculance disputationes I, 68, 69)2)
바울은 이방인들의 추수축제 때 비와 결실, 음식과 이를 통한 기쁨을 주는 존재로 말하는 창조자가 사실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신)과 동일하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방인에게 향한 첫 강론을 마무리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분명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왜 굳이 이렇게 신에 대한 공통의 생각을 언급했을까?
바울의 이런 시도는 아테네에서의 논쟁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그는 아레오바고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일종의 엄밀한 조사와 판단의 자리에 서게 된다(행 17:19). 이 강설에서 바울은 스토아 시인 아라투스의 시를 직접 언급한다(행 17:28).
제우스3) 에게서 시작해 보자. 우리는 늘 그의 이름을 불러왔다. 모든 거리들은 제우스로 가득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모든 평원도 그렇다. 바다와 모든 항구들, 우리 모두가 제우스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또한 그의 낳은 바 된 자들이다. (소생) 그는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여러 표식들을 준다. 그는 모든 민족들이 살 수 있도록 보존해 주며 일하도록 일깨운다. 그는 언제 토양들이 가축들과 짐승들을 위해서 최고의 상태인지를 말하고 그는 어떤 시간이 식물과 짐승들을 위해서 좋은 시간인지도 알려준다. 그리고 씨를 언제 뿌려야 하는지도 (중략) 나는 당신에게 이런 것들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제발 내가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Aratus, Phaenomena)
바울이 인용한 아라투스 시는 위의 전체 시 중에서 한 구절로서 우리는 그의 소생(낳은 바 된 자)이라는 부분이다. 이 시 전체는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신에 대한 노래로 가득 차 있다. 바울은 이 시를 인용하면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생명가운데 있고 움직이며 존재하는 바로 그 존재가 이방인 스토아 시인이 말한 그 신과 사실상 일치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그의 수사는 사도행전 17장 24절부터 매절에서 반복된다. 코스모스(우주)와 그 안에 만유를 지으신 신은 사실 바울이 믿는 천지의 주 곧,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다(24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 신은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가 쓴 편지에게 언급된 바로 그 신이다. 세네카는 신전에서 기도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 이유는 마치 신이 귀가 있어서 신전에 가면 더 잘 들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Senaca, Epistolae IV. 41. 1) 스토아 철학자들이나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모두 신전 제사를 거부했는데 이는 일반 시민들의 신들을 거부하고 대신에 그들의 신을 예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손으로 지은 신전에 있지 않는 신’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신이자 동시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는 그(행 17:25)는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투스(Epictetus)가 말한 신과 동일하다. “신은 위대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땅위에서 경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수단들을 주기 때문이다. 신은 위대하다. 그는 우리에게 손을 주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호흡을 준다. 우리가 자는 동안에도”(Epictetus, I, 16, 17)
그렇다면 아테네에서 행한 바울의 강설을 통해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스토아의 신은 같은 신이라고 믿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가? 그의 강설 전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스토아의 신과 공통되는 부분으로 채워져 있다. 조상적부터 섬겨 오던 바로 그 하나님과 스토아의 신이 공통의 신인 것처럼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강설의 시작에서부터 너희가 알지 못한 채 예배하는 바로 그것을(그 존재를) 내가 설교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bwmo;n ejn w|/ ejpegevgrapto AΓWXTW QEW JO ou\n ouajgnoou’nte” eujsebei’te tou’ton ejgw; kataggevllw uJmi’n. 23절). 여기서 마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스토아 신이 ‘같은’ 신인처럼 말해 온 바울의 의도가 드러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알지 못한 채 신을 예배했는데 사실상 이 신은 그들에겐 알려지지 않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바울이 제시한 강론에서 스토아의 신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공통되는 항목들은 적어도 10가지에 이른다. 그럼에도 바울은 결과적으로 그들의 ‘알지 못함’을 이 ‘공통의 신’을 말하는 최종적인 동기로 고집한다. 이런 바울의 생각은 이 강설의 결론에서도 다시 드러난다. “그 신(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시대에 대해서 간과하시지만 이제는 알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회개를 명령하고 계신다”(30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제까지 나타내지 않는 새로운 일을 하시는 분이다. 이 새로운 일은 스토아의 신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신은 그(예수)를 죽음으로부터 일으킨 분이시다(31절). 하나님은 부활한 그(예수)를 세우셔서 그 안에서 세상을 심판하고자 하신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새로운 일이라는 면에서 이전의 모든 구원역사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가진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한 신과 결정적으로 나누어지는 지점은 이 신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킨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점에서 바울은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신이 사실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완전히 부인하지 않는다. 스토아의 신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러가지 면에서 겹쳐진다. 그는 어떻게 보면 ‘공통의 신’을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그들이 알지 못하고 예배한다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기 때문에 이를 알게 하겠다는 동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바울의 이런 동기와 목적을 우리는 ‘변증’이라는 범주로 규정해 볼 수 있다.4) 공통의 신은 그들의 알지 못함을 알게 하려는 변증의 동기아래서만 유효한 강설이다. 그리고 그들이 알게 되는 최종적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구약의 모든 구원역사와 연속성을 가지지만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하나님으로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측면에서 삼위 하나님만이 공통의 신에 대한 강론을 통해서 바울이 알게 하고자 하는 최종적인 하나님이다.
<주>
1) 볼프는 저서의 초반부에서 사회적인 차원에서 의미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루며 구원과 관련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루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이 저서가 가진 방향성 제시이지만 이 방향성이 가지는 약점 곧,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기독교적인 견해가 아니라 정치신학에 관한 책이라는 근본적인 약점을 이미 노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무리 사회적 차원의 하나님 담론을 말한다 할지라도 이는 기독교 신학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배제할 수 없다. 정치신학의 하나님과 기독교가 고백하는 하나님 곧, 언약가운데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방향성에서 이미 칼빈의 사상을 벗어나 있다.
2) 위의 번역은 다음 원문을 필자가 직역한 것으로 직역에서 오는 어색함은 번역자의 선택이라는 점을 미리 밝힌다.
Caelum nitescere, arbores fronde scere, Vites laetificae pampinis pube scere, Rami bacarum ubertate incurve scere, Segetes largiri fruges, florere omnia,Fontes scatere, herbis prata convestirier,
tum multitudinem pecudum partim ad vescendum,
partim ad cultus agrorum,
partim ad vehendum,
partim ad corpora vestienda,
hominemque ipsum quasi contemplatorem caeli ac deorum cultorem atque hominis utilitati
agros omnis et maria parentia?:
haec igitur et alia innumerabilia cum cernimus,possumusne dubitare quin
is praesit aliquis vel effector, si haec nata sunt,
ut Platoni videtur, vel, sisemper fuerunt,
ut Aristoteli placet, moderator tanti operis et muneris?
3) 여기서의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가 아니라 스토아의 신 혹은 신성으로서 모든 만물에 깃들여진 존재를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을 섭리로서 인도한다. 우주의 움직임을 통해서 그는 인간의 삶을 돌보고 질서 지운다.
4) 엄밀하게 말해서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부터 비로서 ‘변증’에 해당되는 ajpologiva 를 사용한다. (22장 1절, 25장 16절) 따라서 apology의 어원이 되는 성경의 ajpologiva 는 공적인 세상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법적인 변론으로 바울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통치자들과 고소인을 설득하는데 목적을 둔(EDNT) 언설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체포되기 이전의 모든 상황에서 이루어진 바울의 강설은 모두 강론하다(diale, gomai)를 사용한다. 그러나 아테네의 아레오바고는 법의 중심지였고 고소되어 이루어진 공적인 재판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의 법정적인 성격을 담보하고 있고 예비 고소 단계에서 이루어진 강론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변증적인 성격을 띤다고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