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특강| 개혁주의 교회는 ‘팀 켈러’로부터 무엇을 배울까? _ 고상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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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주목받는 리디머(Redeemer)교회 팀 켈러(Timothy J. Keller) 목사의 목회 철학을 들여다보고 개혁교회가 받을만한 교훈과 적용점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 편집자 주

 

개혁주의 교회는 ‘팀 켈러’로부터 무엇을 배울까?<2>

 

<고상섭 목사 | 그사랑교회>

 

<글 싣는 순서>

  1. 복음의 상황화
  2. 문화의 상황화
  3. 따뜻한 개혁주의

 

팀 켈러는 문화적 상황에 맞도록
죄의 개념을 전달하는 문화적 상황화를 시도했다

내가 절망하는 영역에서 하나님은
나의 우상을 알게 하시고, 나를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가장 높은 위치의 사랑일 때
역경 중에도 감사와 신뢰가 있다

 

  1. 문화의 상황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면 죄를 깨닫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다. 모든 건전한 부흥의 중심에는 늘 회개가 뒤 따른다. 그러나 오늘날 회개와 회심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들을 들을 때가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아마도 사람들이 죄에 대해 듣기를 싫어하는 성향 때문에 죄에 대한 각성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죄에 대해 듣기를 싫어하는 이 시대에 어떻게 회개에 이르는 복음을 선포할 수 있을까?

로버트 슐러 목사는 성도들에게 ‘죄’라는 용어 자체를 사용하지 말고 ‘상처’라는 말을 사용하라고 권면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 말고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소비자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극단으로는 로버트 슐러의 이론에 반대하여 극단적으로 죄에 대해 선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특히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선명한 복음을 위해서 죄에 대해 분명한 지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을 희석시키지 않고 죄를 분명히 선포하는 것과 죄를 바르게 깨닫게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로버트 슐러 목사가 한쪽 극단에 있다면 모든 설교에서 사람들에게 죄를 지적하는 설교는 또 다른 극단에 서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에 대한 설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이야기하면 어떤 목회자들은 성도의 타락한 본성이 죄를 싫어하는 것으로 치부하며 더욱 강하게 죄에 대해 언급하기도 한다. 죄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고, 죄에 대해 늘 명확하게 언급하는 것도 부작용이 많다면 어떻게 죄를 설교하고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 물론 사람의 회개는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이지만, 그렇다고 목회자가 아무렇게나 선포해도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팀 켈러 목사도 죄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뉴욕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부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받은 경험이 있었다. 기독교의 죄 개념에 대해 문화적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다고 이야기할 만큼 젊은이들이 죄의 개념을 거부했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팀 켈러 목사는 죄에 대해 언급하기를 포기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힘들어 하는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죄에 대해 계속 설교하지도 않았다. 그는 제3의 길을 선택했는데, 문화적 상황에 맞도록 죄의 개념을 전달하는 문화적 상황화를 시도했다.

 

내 안의 우상을 발견하라

팀 켈러 목사는 웨스트민스트 상담학 교수였던 데이비드 폴리슨의 글을 통해서 죄를 ‘우상숭배’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어떤 특정한 행위를 죄라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마음의 동기를 바라보게 한다. 그는 <내가 만든 신>에서 죄를 우상숭배와 연결시키고 죄를 “내가 사랑하는 것인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한다.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하고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좋은 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순위가 높을 때 그것은 우상이 되고 그 우상은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

“사람들은 우상이란 나쁜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상 대개의 경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좋은 것이 한층 더 좋아질수록 우리 내면 깊숙한 곳의 욕구와 희망이 충족되리라는 기대감을 더욱 부풀리게 된다. 무엇이든지- 특히 삶의 가장 좋은 것들이야말로- 짝퉁 하나님, 즉 거짓 신이 될 수 있다.”

또 자신의 우상을 분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진다. “내가 하루 동안 제일 많이 상상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게서 없으면 안 되는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또 영적인 문제까지도 우상이 될 수 있음을 언급하면서 “내가 간절히 기도하는 제목은 무엇인가?”등의 질문들 통해 내 안에 있는 결코 굽힐 수 없는 감정을 돌아보라고 권면한다. 특히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걱정, 혹은 실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포장된 우상이라고 말한다.

우상이란 뿔이 달린 악마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곧 우상이 될 수 있음을 언급하면서 특정한 행위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내 삶의 모든 것이 다 죄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죄의 뿌리를 돌아보게 한다.

 

사랑의 순서를 회복하라

또 팀 켈러 목사는 ‘슬픔’과 ‘절망’의 차이를 이해하라고 말한다. 슬픔이란 위로받을 수 있는 고통이지만 절망이란 위로를 받지 못하는 고통이라 정의한다. 절망이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인데 그것을 궁극적으로 잃어버렸을 때 오는 감정이다. 하나님도 계시고, 말씀도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 절망을 경험하는 이유는 그 절망이 바로 나의 우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식의 문제로 깊은 절망에 빠져서, 예배를 드릴 수도 없고 말씀을 볼 수도 없는 상태에 있다면, 그 절망의 원인은 결국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 자식이 자신을 실망시킨 것에 인생이 무너지는 것같이 절망하는 것이다. 그 문제에서 회복되려면 “내가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습니다.”라는 회개를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그래서 팀 켈러 목사는 우리가 절망하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돌아보라고 권면한다. 바로 내가 절망하는 영역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우상을 알게 하시고,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시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정의하기를 ‘순서가 바뀐 사랑’(disordered love)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하는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있을 때 순서가 바뀌기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교양>에서 향유하는 사랑(Frui)과 사용하는 사랑(Uti)이 있다고 말한다. 향유하는 사랑이란 그 사랑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가장 우선순위의 사랑이며 향유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러나 다른 사랑이 향유의 대상이 되면 우상이 되며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된다. 노트북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자기 자식보다 노트북을 더 사랑한다면 사랑의 순서를 바꾸는 죄가 된다.

팀 켈러는 그 우상에서 벗어나려면 사랑의 순서를 바꾸라고 말한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대상을 회개하며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때 삶은 참된 변화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죄를 향해 지적하고 행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라는 개념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동기를 바라보게 하고 사랑의 순서를 바꿈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팀 켈러가 가지는 문화적 상황화의 한 단면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평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 직장 안에서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 또 가족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승진 때문에 자녀에게 소홀하게 될 것이다. 이런 순서가 바뀐 사랑은 언제나 불행과 붕괴로 귀결된다. 더 나아가 흔히 보기에 영적으로 보이는 것까지 우상으로 탈바꿈 할 수 있음을 경고하기도 한다.

어떤 목회자가 건강한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할 때, 그것도 우상숭배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건강한 교회를 꿈꾸지만 현실에서 교회가 건강해지지 못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해 좌절할 수가 있다. 또 성도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성도들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건강한 교회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건강한 교회에 장애물이 되는 외부의 압력이 있을 때 두려워하게 된다. 교회 월세가 올라간다든지, 갑자기 건물을 옮겨야 하는 환경앞에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건강한 교회라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을 때 그것은 우상이 되어서 자신을 좌절시키고, 성도들을 비난하게 하며, 외부의 압력 앞에 두려워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높은 위치의 사랑이 될 때,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부족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게 되고, 또한 내가 힘든 상황 속에서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더욱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팀 켈러가 ‘죄’에 대해 명확하게 선포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들을 때가 있다. 그 비판은 표면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단순한 죄를 지적하는 것보다 더 깊은 우상숭배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다. 죄를 단순히 선포하는 것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개념들을 다 내려놓게 함으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게 하는 것이 더 깊은 회개와 삶의 변화에 효과적일 수 있다. 회개와 회심이 잘 보이지 않는 시대라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어쩌면 죄에 대한 선포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상황화되지 않는 선포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팀 켈러는 죄에 대해 듣기를 싫어하는 이 시대에 우상숭배라는 개념을 통해 더 깊은 죄의 동기를 보게 하고 사람들을 회개로 인도하여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랑의 순서를 바꾸어 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런 문화적 상황화가 아닐까 한다. 죄에 대한 개념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바르게 전달하여 회개로 인도하는 일은 더욱 중요할 것이다.

“지금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음 호 최종>

 

* 고상섭 목사 _ 합신 졸업. 제자훈련연구소, CTC korea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