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목회특강| 목회 및 신앙 교육의 균형감(2) _ 나현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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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목회 특강|

* 교회 계절 신앙 교육의 시기에 체코의 철학자, 신학자, 교육자이며 종교 개혁가로 알려진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를 통해 신앙 교육의 목회적 가치를 재고하는 데 도움을 받고자 3회에 걸친 특강을 마련했다. – 편집자 주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John Amos Comenius)에게서 배우는

목회 및 신앙 교육의 균형감 (2)

 

<나현규 목사 | 합동 총회교육출판국/교재개발팀장>

 

<글 싣는 순서>

  1.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는 누구인가?
  2. 전체적 지혜에 주목하기
  3. 완전성과 전체성의 조화

 

  1. 전체적 지혜(Pansophia)에 주목하기

 

만약 누군가 내게 코메니우스(John Amos Comenius: 1592-1670)의 사상 이해를 위해 알아야 할 ‘핵심 단어’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미로’(labyrinth)와 ‘판소피아’(Pansophia)라고 대답하겠다.

 

<그림1> 코메니우스가 그린 미로(Comenius, 1665)
<그림2> 『세계도회』의 하나님(Deus)(1)(Comenius, 1658)
<그림3> 『세계도회』의 하나님(Deus)(2)(Comenius, 1887)
<그림4> 코메니우스의 지혜의 삼각형(Comenius, 1922)
<그림5> 세계의 형태(Comenius, 1665)

 

<그림1>은 코메니우스의 책인 「언어의 문」(Janua linguarum)에 나오는 ‘미로’(Labyrinthus)다. 그림 하단에 입구가 보인다. 목적지에 해당하는 중앙의 나무에 이르는 길은 첫 갈림 길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흥미로운 것은 두 길 모두 결국에는 목적지에 이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헤매지 않고 얼마나 쉽고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느냐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7세기에 본격화된 이성과 자연의 분열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미 16세기 이후 근대사조는 과학혁명에 힘입어 지식의 세분화를 사명으로 여겼다. 이로 인해 학문적, 사상적 분리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17세기의 탁월한 교육학자요 철학자이며 신학자였던 코메니우스는 이런 현상을 ‘미로’에 비유했다. 코메니우스는 자신의 책 『필요한 한 가지』(Unum Necessarium)의 1장에서 ‘미로’를 설명하면서, 그리스의 미노스(Minos) 신화를 언급한다. 그는 마치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수 천 갈래로 갈리는 끝없는 미로를 연상했던 것이다. 코메니우스가 보기에, 당시 ‘미로’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기 위한 많은 학자들의 시도들은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미로를 추가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코메니우스가 언급한 학자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Ren Descartes, 1596-1650)였다.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세상은 어둠, 무질서를 상징하는 ‘미로’에 빠져 있다. 그 ‘미로’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코드 숫자가 있는데, 바로 ‘3’과 ‘1’이다. 이 숫자는 ‘삼일성’(三一性, trinality)이라는 특성에서 나온 것이며, ‘삼일성’은 ‘삼위일체’(Trinity)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삼일성’이란 부분이 아닌 전체(‘1’)를 의미하며, 또한 단순한 본질의 세 모양(‘3’)을 의미한다. 코메니우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창조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사상체계인 판소피아를 구상했다(<그림2>를 참조하라). 한마디로 말해서 ‘미로’에 대한 해법은 ‘필요한 한 가지’이며, 그것을 사상적으로 표현한다면, ‘판소피아’이다. ‘미로’가 질문이라면, ‘판소피아’는 그에 대한 답변이다. ‘미로’가 당시의 어두운 혼돈이라면, ‘판소피아’는 빛의 길이다. ‘미로’가 문제라면, ‘판소피아’는 대안이다.

그렇다면 ‘판소피아’란 무엇인가? ‘판소피아’는 ‘전체’, ‘보편’, ‘우주’를 뜻하는 ‘pan’과 ‘지혜’를 뜻하는 ‘sophia’의 합성어다. 즉 ‘판소피아’란 전체적 지혜를 말한다. 코메니우스가 생각하는 판소피아 개념은 그의 『판소피아 실제 사전』(Lexicon Reale Pansophicum)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판소피아란 전체적 지혜(sapientia universalis)다: 즉 사물의 존재가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이르는 목적과 바른 사용은 무엇인지에 대한 앎이다. 그래서 세 가지를 요구한다. 첫째,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 그 존재방식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 셋째, 마지막으로 모든 것은 그것의 사용 목적에 따라 제시되어야 한다.”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판소피아는 진정한 앎에 대한 전체적 지혜다. 진정한 앎이란 사물이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존재의 근원에 대한 앎, 그것이 어떻게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존재방식에 대한 앎, 그것의 바른 사용 및 목적에 대한 앎을 포괄하는 전체성을 띠고 있다. 이런 판소피아 개념은 삼위일체 신비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코메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이런 기독교 판소피아(Christian Pansophy)로 하여금, 지혜로우시고, 전능하시며, 최고의 선(善)이시자 영원토록 경배를 받으실 여호와(JEHOVAH), 유일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삼위일체에 대한 삼원성의 신비(Ternary mysteries)가 펼쳐지도록 하라.”

여기서 주목할 것이 바로 코메니우스가 제시하는 삼일일체 하나님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그림2>는 『세계도회』에 나오는 ‘하나님’(Deus)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림2>에서, 점선으로 된 가운데 작은 원과 삼각형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낸다. 점선으로 된 원 안의 작은 4개의 글자들은 신성4문자(Tetragrammaton)인 히브리어 ‘야웨’(hwhy)를 지칭한다. 비록 <그림2>에서는 원 안의 네 글자가 히브리어 ‘야웨’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아 보이지만, 다른 판본의 경우, <그림3>에서와 같이 그림 중앙에 ‘야웨’라는 신성4문자(hwhy)를 정확하게 표기하고 있다. <그림2>에서 점선의 작은 원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상징하며, 점선의 삼각형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적 특성을 상징한다. <그림3>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적 특성을 매우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가운데 ‘야웨’ 하나님이 삼위로 존재하시는 것을 성부(Pater), 성자(Filius), 성령(Spiritus)으로 표기하고 있다. 특별히 <그림2>와 <그림3>에서 공히, 하나님을 점선으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이미지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2>에서, 가운데 원과 바깥의 큰 원은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에 대한 ‘전체성’을 상징한다. 즉 우주적 포괄성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그림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림4>는 코메니우스가 죽기 6일 전에 마무리한 책인 『트리에르티움 카톨리쿰』(Triertium Catholicum)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그림이다. 코메니우스는 이를 ‘지혜의 삼각형’(Sapientia Trigonus)이라고 명명하고, ‘창조물의 실재를 나타내는 원’(e Rerum Circulo Factus)이란 부제를 달았다. 비록 중앙에 위치한 것이 ‘사물’(res)이지만 이 그림에서 핵심은 사물이 아니다. 큰 원을 따라 기술되어 있는 단어들(Humana-excellentia-tres Dotus)이 <그림4>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탁월한 능력’(excellentia)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주신 ‘세 가지 선물’(tres Dotus)을 상징하는 ‘인간’(Humana)의 특성인 ‘정신’(Mens), ‘혀’(Lingua), ‘손’(Manus)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이 <그림4>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특성인 ‘정신’, ‘혀’, ‘손’은 그림에서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위치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삼원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과 관련하여 큰 원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다면, 역삼각형은 하나님의 삼일성에 대한 형상으로서의 삼원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삼일성에 대한 이미지가 <그림2>에서 점선으로 된 삼각형이었다면, <그림4>에서 실선의 역삼각형은 그 삼일성에 대한 형상적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삼원성과 중앙의 사물과의 관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인간의 삼원성에 대하여 살펴보면, 첫째, ‘정신’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간의 지적인 능력 혹은 사고(thought)가 이것으로부터 말미암는다. 둘째, ‘혀’는 모든 사물에 대한 해석의 도구로서 ‘언어’ 혹은 ‘말’이 이것으로부터 나온다. 셋째, ‘손’은 사물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으로서 ‘일’ 혹은 ‘노동’이 이것을 도구로 하여 이루어진다. 이런 인간의 특별한 기능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는 과정은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할 것을 먼저 계획하셨고(창 1:26b), 그것을 말씀하셨으며(창 1:26a), 그 후에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창 2:7). 이것은 곧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특징으로 나타났다. 즉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이 땅 위의 모든 동물들을 그 앞으로 이끌어 오는 것을 보았으며(창 2:19a), 그것들의 이름을 지었으며(창 2:19b), 에덴동산에서 머물면서 경작하며 다스리게 되었다(창 2:15). 코메니우스는 이런 과정을 인간의 삼원적 특성인 ‘관찰’(정신), ‘이름 지음’(혀), ‘행동’(손)과 연결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이런 세 가지 자질은 하나님이 창조한 사물을 ‘연구하며’(지식), ‘가르치며’(언어), ‘경작하라’(행동)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창 1:28)과 연결된다. 따라서 <그림4>에서의 핵심은 사물(res)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연구하고, 전달하며, 경작하는 인간 즉 인간의 삼원적 특성(정신, 혀, 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봐야 할 그림이 <그림5>다. 이 그림은 코메니우스의 『언어의 문』(Janua linguarum)에 나오는 ‘세계의 형태’다. 이것은 코메니우스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코메니우스는 세계를 크게 하늘(Caelum), 대기(Aer), 땅과 바다(Globus terra et aqua)로 삼등분하고 있다. 세계에 대한 이런 삼중 구분 역시 코메니우스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하나님의 형상적 요소(삼원성)를 통해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삼원성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며, 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역시 그것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지금까지 진술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판소피아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판소피아란 모든 것의 근원이며 중계자인 동시에 목적이신 하나님과 관련된 지혜다. 하나님은 영원하기에 근원이요 시작이며, 삼일성을 가지고 있기에 방편이요 중계자인 동시에, 완전하시기에 목적이요 지향점이다.

둘째, 판소피아는 영역과 관련된 하나의 큰 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인간’, ‘세계’라는 영역적 틀이다.

셋째,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에게로 향하여 나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과 그것들의 모든 존재방식과 그 모든 것의 존재목적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일적 특성인 삼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세 번째의 특징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병행주의’(Parallelismus)적 특징을 언급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삼일성이 인간과 모든 사물에 삼원적으로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삼중적 혹은 삼분법적으로 분류하여 인식하는 개념을 의미한다. 병행주의는 모든 분야의 유기적 관계와 서로간의 조화를 가정한다. 즉 각 분야가 아무리 달라 보여도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의 관계 아래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판소피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매우 중요시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 놓여 있으면서, 그것을 중계하는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회복된 인간의 사명이기도 하다.

코메니우스의 판소피아는 부분적 지혜가 아닌 전체적 지혜다. 신앙의 영역, 이성의 영역, 감각의 영역을 포괄하는 전체적 지혜인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판소피아는 세계관이다. 코메니우스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교회 안에서만 통용할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안에서 실현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런 안목이 지금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필요하다. 따라서 코메니우스의 판소피아는 목회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영역 주권을 회복시키는 안목을 키워 주며, 균형감을 잡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