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타락한 지위에서 비참한 것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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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목사/소식교회

제19문

문 : 사람이 타락한 지위에서 비참한 것이 무엇입니까?

답 : 모든 인류가 타락함을 인하여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고 또 그의 진노
와 저주 아래 있어서 생전에 모든 비참함과 사망과 영원한 벌을 받게 되었습
니다.
성경 :창5장제

사람이 타락한 결과

칼빈은 사람이 타락한 결과를 이야기 함에 있어서 “인간은 지금 선택의 자유
를 박탈 당한채 비참한 노예 신분으로 전락해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성령의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은 암흑이다”라고 함으로써 사람이 타락
한 결과로 오는 바 전적 무지와 전적 부패를 항상 짊어지고 있는 양으로 말하
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은 율법의 첫째 돌판에 관해서
는 전적으로 무력하며, 둘째 돌판에 관해서는 결정적인 경우에 무력하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의 의지는 선
을 사모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에게는 전적인 무능까지 겹쳐져 있
고, 덧 
씌워져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본성의 부패를 로마서
3장이 증언한다” 하였으며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정
죄 받을 일 밖에 없다”고 간파하였습니다. 

1.사람이 타락한 결과는 무엇보다도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
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1) 여기 창세기 5장 기록된 아담 자손의 계보를 읽을 때 우리의 주의를 끄
는 점은 이 시대에는 사람이 오래도 살았구나 하는 점입니다. 
930세,912세,905세,910세,… 등등의 이런 나이는 우리의 처지에서는 상상
하기 어려운 장수입니다. 그리하여 이 점이 우리의 눈에 띄게 됩니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신 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
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복을 주신 데서부터 시작하여 인류의 역사
를 쭉 읽어오는 처지에서는 이와같은 기록은 오히려 “죽었더라” “죽었더
라” “죽었더라”는 묘사가 더욱 인상적인 기록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결국 사람은 죽는 것이다”는 어김없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
r
다. 이 앞부분에도 사람이 죽는 사실은 기록되었으나 그것은 사람이 그 이웃
을 죽인 일, 즉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경우였습니다(4장). 
그러나 이렇게 창세기 5장에서는 “몇세를 향수하고 죽었다”고 말씀하고 
또 그런 방식으로 기록해둠으로써 아담으로부터 대대로 그랬음을 보여줍니
다. 
이렇게 아담자손의 계보가 계시로 기록되면서 단 몇줄에, 때로는 단 한줄에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특징과 그 일생을 축약해 두었습니다. 
족보의 중요성에서 볼 때에 다음 족보가 나올 때까지 이 족보가 “성 삼위일
체이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친히 정하신 하나님의 의지가 충분히 반영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담에서 노아까지 그들의 일생을 축약하여서 기록하여 둠으로써 사람
이 결국은 죽는 것임을 못박아 놓았습니다. 

2.이렇게 타락이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는 인생에게 필연적으로 
사망이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1) 이 죽음의 일은 조상대대로 겪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그 사실을 보고 듣는 우리로서는 죽음은 사람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초

목이 싹이 나고 무성했다가 시드는 것과 같이 인생도 낳았으니 죽을 때도 있
다는 식으로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때로는 젊었으므로 그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다가도 나이들고 늙어가면서 운
명론에 밀린 듯이 죽음을 인정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든 사람들은 부활을 도무지 믿지 못할 일로 여길 만큼 죽음을 자연스러
운 일로 여깁니다. 그러나 과연 사람의 죽음이 처음 창조의 본래 질서에 순응
하는 일이겠습니까?

2)우리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두 가지를 들어 반증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 5장을 앞의 2장 16,17절의 말씀과 연결시켜 보면 사람이 하
나 님의 명령을 어길 때,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신 바가 그대로 된 
것이기 때문에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의 결과 
입니다. 
둘째는, 아담의 칠세손 에녹의 경우에는 죽음의 기록이 없습니다(5:2
1-24)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우에 죽음의 기록
이 없는 것은 죽음이 자연 질서의 과정이 아니요 하나님의 저주의 표현임을 
말하여 줍니다. 
3)이 기록은 겸하여 땅 
위에는 이 외에도 저주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
다.5장 29절에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라멕이 노아를 낳고 한 말 입니다. 
사람이 수고로이 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신 결과라 하였습니
다.하나님께서 따로 안위의 방식을 주셔야 할 만큼 일 자체가 고역이 되었습
니다. 또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결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모본을 따라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특권이고 복이겠습니다(창세기1장,2장).
그렇지만 타락 그 이후에 수고로이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그 일과 그런 
환경이란 저주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잉태하고 해산하는 일이, 그리고 가정생활 그 자체가 굉장
한 복일찌라도 또 한편으로는 잉태의 고통이 더해진 것과 자식을 해산하는 산
고와 남편을 사모하고 다스림 받는 그 일들과 그 과정이 하나님이 내리신 저
주의 결과로 여전히 있는 것이요(창3:16) 아담에게 주어진 환경과 그가 
맡은 일 과 그가 필경 흙으로 돌아가는 형편이란 분명히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 입니다
(창3:17-19). 특별히 하나님의 동산에서 내침을 당한 것이 바로 그런 
것 입니다(창세기3:22-24).

3.범죄이후에 인생이 사는 땅 위에는 이 외에도 비참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
다 여러 가지 질병과 앉은뱅이, 소경, 벙어리 같은 불구, 지진, 가뭄, 
홍수같은 천변지재, 전쟁이나 경제공황들의 비참이 땅 위에는 꼬리를 물고 
옵니다. 
이런 비참의 근원에 대하여는 창세기3장이 실마리를 보여 줍니다. 
사람이 범죄하자 하나님께서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 낼 것을 말씀하셨습니
다. 이것을 시작으로 인생들이 거하는 땅 위에 비참한 일들이 내리기 시작했
습니다.

4.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그리고 생의 비참함 중의 가
장 큰 것은 지옥의 형벌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죽어서나 좋은데로 가야 할텐데”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서 그것은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라 막연한 불안을 가지기
도 합니다. 또한 그것은 미래의 일이라 아무도 경험으로 확신을 가지고 말하
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우리에게 확
실한 것을 가르
쳐 줍니다(마8:12-13,막9:47-48,마25:41). 
지옥은 우리가 가 보지 못했고 아직은 미래의 일이지만 예수께서 또 성경에
서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그곳이 있음을 알리고 또 경고 하기까지 합니다.

5.이 모든 비참은 결국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끊긴데서 옵니다. 
원래 사람이 하나님 가까이 있어 막힌 것이 없었을 때는 이러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무
한한 복이요 영광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함으로 이런 영광을 잃게 된 것은 생의 비참함 중의 비참
함 입니다. 그런데도 죄인은 그 죄악을 버리기 싫어서 오히려 하나님이 멀
리 계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시10:11). 
그러기에 삶의 도처에 죄인들의 공허와 불안 등이 있습니다. 

6.그러나 이 모든 비참에서 구출받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구하게 됩
니다(시13:1). 인생의 특이성은 만물을 주관하는 것과 생각하는 존재
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점 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함에 결함이 없도록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것 
입니다
(창1:26-27). 
이것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점 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외모
가 아니고 중심이며, 모형이 아니고 영적 교류라 하겠습니다. 
영적 교류라 함은 그가 지닌 지식, 사랑, 성결 등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엡4:24,골3:10). 하나님과의 이같은 교제는 영적이고도 생명적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제가 끊어진 것은 가장 근본적이요, 큰 불행이라 
하겠습니다(눅15장). 마치 나뭇가지가 원 줄기에서 끊긴 상황과 같습니
다. 

성도란? “구별된 교제자” 입니다. 
즉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의 교제가 회복된 자라 할 수 있습니
다 여기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란, 성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
과의 교제와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것으로 부터 나오는 바 우리의 이웃과의 교
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차적인 우리의 이웃은 성도들 상호간 입니다. 
그렇게 성경이 말씀 하는바 하나님의 사람이란 바로 이런 자들을 지칭하는 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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