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원 교수(조직신학)
알브레히트 리츨 (Albrecht Ritschl, 1822-1889)
슐라이어막허에 이어 현대 신학에 큰 영향을 준 리츨은 계몽주의와 과학의 발
달로 영향력을 잃어 가던 기독교를 다른 차원에서 해석했다. 그는 신학과 과
학 사이에 발생되는 갈등은 단지 ‘과학적’ 지식과 ‘종교적’ 지식이 따로 있음
을 바로 구분하지 못한데서 생겼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지식이란 순수 이론
적 객관성에 근거하고 종교적 지식은 실재(reality)에 대한 가치 판단들로 이
루어진 것이라 그는 믿었다. 달리 표현하면 과학적 지식은 다만 사물의 존재
양식에 관한 것인 반면, 종교적 지식은 항상 사물이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할
까 하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은 역사적 사실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들 속에 인지(認知) 할 수
있는 가치에 관한 지식이라는 것이다. 리츨에게 가치(value)라는 것은 단지
어떤 윤리적인 것만 아니라 실재의 주어진 사실 혹은 관점의 의미도 들어 있
다. 그래서 그는
“모든 신학적 교리는 기독교인의 삶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 간단히 리츨의 신학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리츨의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관계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
은 자연과 도덕의 원리이고 그의 근본적 성품은 모든 자를 사랑하시는 것이라
고 한다. 그 하나님의 인격이나 속성은 오직 우리를 통해서야 이해할 수 있다
고 한다. 이러한 하나님은 슐라이어막허의 개념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우리
가 깨닫지 않으면 그 하나님은 존재하시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리츨은 죄를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
라 개인 자유의 오용 혹은 이기심으로 보며 자유와 도덕적 가치에 방해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죄나 의가 다른 사람에게 전가될 수 없다
고 한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율법적인 것에 얽매
일 수가 없다고 한다.
기독론에 있어서도 ‘가치’의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리츨에게는 그리스도
의 ‘인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그의 가치’가 중요한
것이다.
즉 ‘어떻게 그리스도가 나를 도덕적으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가’가 중요
한 것이다. 또한 리츨은 그리스도가 영원전부터 선재하셨다는 전통적 교리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러한 것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아무런 가
치도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영원성이나 신성의 가르침은 오히
려 우리를 그리스도와 멀어지게 하는 것이요 우리로 그를 본받는데 불가능하
게 만든다고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신성하다고 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으
로부터 주어진 임무에 극도로 충성했기 때문이요, 그가 우리를 위한 고유하
고 특별한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말은 예수도 우리처럼 순간 순
간 그의 의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는 것이 전제된다. 그러므로 우리
는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고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성의 특징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차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지
만 구원의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말한다.
리츨이 말하는 구원이란 모든 사람에게 있는 도덕적 성숙의 가능성을 현실화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
다. 또한 믿
음이란 예수의 과거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현재, 즉 그가 오늘날 우
리안에 갖도록 하는 도덕적-윤리적 가치에 근거한다고 한다. (이렇게 모든자
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사람안에 내재하는 도덕적 가능성을 강조
하는 리츨의 구원관에는 전통적 대속의 교리나 제한적 속죄의 교리가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한 그의 신학의 중요한 개념중 하나인 ‘하나님 나
라’란 ‘인간과 하나님의 공통적 도덕적 목적을 이루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안에서 사랑의 동기와 상호적 행동 연합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리츨의 신학의 문제들 중 두가지만 논한다면 첫째, 그의 가치의 개념
이다. 리츨은 마치 과학적 지식은 어떤 가치 판단 없이 순수하게 객관적이라
믿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가설(hyposthesis)이나 과학적 제
안(proposition) 역시 가치 판단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그는 몰랐던 것이
다. 또한 종교적 지식에는 리츨이 주장하듯이 역사적, 객관적 지식이 결여되
고 가치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가치가 들어 있는 역사적 지식인 것이
다. 그리고 리츨이 말
하는 종교적 지식에서의 가치란 (비록 하나님 나라의 가
치, 복음의 가치를 말하지만) 성경을 떠난 가치요 인간의 자율적인 가치에 불
과하다. 또한 리츨은 그리스도의 가치를 인간과의 관계에서 말하지만, 그리스
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모든 인류가 따를 가치가 주어질 수 있
겠는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면 굳이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리츨
이 인정하는 그리스도의 신적 가치란 그가 바라는 인간의 이상적 모습일 뿐이
다.
둘째로, 리츨의 신학 역시 칸트의 본체적/현상적 이원론적 세계에 근거한다.
그가 말하는 ‘가치’란 바로 칸트의 본체론적(noumenal) 세계에 속한 개념이
다. 역사나 경험(현상적 세계)과는 거리가 멀지만 실천적 필요에 의해 주어지
는 ‘가치’의 개념인 것이다. 또한 리츨의 하나님 나라란 인간의 자율성을 극
대화하고 인간의 자유를 완전 보장화하려는 일종의 바벨탑과 같은 것이다. 그
래서 리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다. (사실 칸
트의 본체론적 세계는 알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의 내재
성, 즉 인간과의 관계만을 강조한다. 비록 하나
님의 초월성을 전제하지만 별
의미 없는 초월성이고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을 보장하는 초월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