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속죄, 더 이상 운운할 필요 있는가?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역사 속에서 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이래, 사람들은 구원과 관련하여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 왔다. 특히 회자되었던 내용들은 인간자력구원 혹은 신인협력구원과는 달리 전적으로 이신칭의에 따른 타력구원이 주요 논제였었다.
이와 관련해 오랜 논제들은 펠라기우스를 정점으로 이단으로 정죄됨으로써 오로지 이신칭의에 따른 타력구원만을 교회는 고백하게 되었다. 그리고 1618년에 공교회는 이와 관련한 교리를 신앙으로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도르트 신앙고백서의 주요 주제들인 TULIP 교리는 공교회가 심사숙고하고 연구하여 정립하게 된 것이다.
이 교리는 어느 누구 혹은 몇몇 사람들의 학설도 아니며, 또 그렇다고 이제 와서 신학적으로 재해석할 논제도 아니다. 곧 도르트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충분히 주지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TULIP 교리를 재평가할 대상이 이미 아니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미 공교회가 고백해 온 그 내용을 우리는 고백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혹 내가 아직 그 내용을 모두 받아들이지 못한다 할지라도 신자는 공교회의 고백을 계승할 위치에 있는 것이며, 그 내용을 자신의 신학적인 식견이나 이론으로 모두 해명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 내용이 모두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고백서대로 외우고 고백하는 것이 일차적인 신자의 의무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역사적인 공교회가 고백해 온 그 내용을 숙지하고, 고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제한속죄’뿐 아니라 TULIP 교리를 논제로 삼아 논란을 불러일으킬 이유가 없다. TULIP 교리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해명이 되었으며, 개 교회 또는 신자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심도 있게 결정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그 교회는 또는 그 자신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로 갈라지는 것이다.
칼빈주의를 운운하면서 ‘제한속죄’ 교리의 정당성을 따진다는 것은 더 이상 그 자신이 칼빈주의를 따르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 교회와 신자는 교리를 모두 이해해서가 아니라 역사적인 공교회가 고백해 온 그 교리를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것에서 비로소 교회이며 신자임을 드러내어야 한다.
교회와 신자는 이처럼 교회의 신앙고백 위에 서 있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