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예배와 시편 찬송의 사용
< 최덕수 목사, 현산교회 >
불교에서 미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면, 기독교에서는 음악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지난 일이지만 서울 동부 이촌동의 한 교회에서 시작된 ‘경배와 찬양’이 모든 교회의 정기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던 시절, 전도사나 부교역자를 구하는 광고를 할 경우에는 언제나 ‘찬양에 은사가 있는 자’라고 하는 기준을 예외 없이 요구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 한국교회가 찬양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었는지를 반증한다.
하지만 “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라는 절규에 가까운 찬송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예배가 예배다워졌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말았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순수한 마음과 열정만 있었지 음악을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 교회 안에서 음악의 사용
많은 신자들이 음악 자체가 가진 힘에 압도당해 감정이 흥분되고 고양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거룩한 예배와 찬양을 놀이와 축제로 만들어 놓은 줄도 모르고 내가 기쁘고 즐거우면 하나님도 기뻐하시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음악은 사람들에게 주는 기분 좋은 감정을 결코 하나님께 중개하지 못한다.
칼빈은 음악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 사용될 필요가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었다. 제네바 시편찬송(1543년) 서문에서 그는 “사람을 즐겁게 하고 그에게 기쁨을 주는 데 적절한 다른 것들 사이에서도 음악은 첫째이거나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음악은 하나님께서 그 사용을 위임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는 점은 필수적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칼빈은 음악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경배하면서도 타락할까 염려하는 우려의 마음을 함께 가졌다. 칼빈의 염려는 역사 가운데 현실로 드러났다. 음악사용이 신학적 이해 안에서 이루어졌던 16세기와 달리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용도가 아닌 자기감정을 표현하고 즐기는 수단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오늘날 현대 복음주의 교회들도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 Service’라고 말한다. 예배가 서비스라면 그 중심은 예배자여야 하는가, 아니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어야 하는가? 대답은 자명하다. 서비스가 고객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면 예배와 찬양 역시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인가’라는 물음보다 ‘예배자들이 오늘 어떤 감동을 받았는가’라는 물음을 더 우선시한다. 이는 종교개혁의 정신과 맞지 않다. 이 세상 왕을 알현할 때에도 왕실의 제도를 따르는 법인데, 하물며 하늘의 왕이시오 만유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이시랴!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송
우리는 우리가 좋은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송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찬송 중에 하나님의 위엄에 합당한 음악을 선택하여 사용해야 한다.
‘불만 붙이면 되지, 굳이 하나님이 사용하라 하신 불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드렸다가 향단에서 불이 나와 죽임을 당한 나답과 아비후의 실수, 나아가 ‘법궤는 옮기면 되는 것이지 어떤 방식으로 옮기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라고 생각했다가 죽임을 당했던 웃사의 실수를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도 바울이 권면한 바 그리스도의 말씀이 신자에게 충만히 임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를 다스리는 신령한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성령의 신령한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신자는 또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마음과 외적인 태도가 진지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또한 미미하다. 가까이 하지 못할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신자의 자세가 세자가 부왕에게 나아가는 자세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신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정서를 함께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시 2:11).
3. 교회가 불러야 할 찬송
많은 이들이 내용과 형식과의 관계를 너무 쉽게 생각한 나머지 가사가 기독교적이라면 선율이야 어떠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멜로디만 듣고 있노라면 세상 유행가와 다를 바 없는 찬송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용과 내용을 담는 틀과 형식은 살과 뼈와 관계처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가사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이 행하신 일이어야 하고 선율과 화성도 그에 걸 맞는 것이라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 찬송이 바로 칼빈의 제네바 시편 찬송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칼빈의 시편찬송가를 불러 왔다. 어떤 이들은 ‘칼빈의 시편찬송가를 고집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라고 반문하기도 한다. 물론 칼빈의 시편찬송만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칼빈의 시편찬송가를 불러 본 경험도 없으면서 비판부터 하고 나선다는 것이다.
필자가 시무하는 현산교회에서는 통일찬송가와 함께 스코틀랜드 시편 찬송가를 10년 이상 불러오고 있고 올해부터는 칼빈의 시편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시편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거룩한 정서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다.
칼빈은 음악이 너무 부요하고 아름답게 되면 음악 자체가 주목을 끌고 마음을 말씀에 집중하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했기에 악기 반주 없이 시편이 불려지도록 하였다. 사람의 음성이 영혼이 없는 모든 악기를 훨씬 능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처럼 무반주로 찬송을 해야만 한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칼빈과 같은 음악에 대한 세심하고 주의깊은 이해를 가지고 예배하며 찬송해야 한다는 말이다.
마치는 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가사의 내용보다 곡조에 더욱 끌려갔다면 벌 받을 죄를 지은 것으로 고백합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우리 중에 이런 내용의 참회의 기도를 한 사람이 있는가? 신자는 찬양을 자기 흥에 겨워 부르거나 예술적 감흥에 겨워 불러 제치듯이 불러서는 안된다. 진리의 통제를 받지 않은 자기 열정과 자기 과시의 방편으로 음악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주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듯이 찬송 또한 하나님이 들으시도록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불러야 한다. 성령께서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을 따라 불러야 하며, 혀로만이 아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예배가 예배다워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