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강좌
성경적 종말론에 근거한 신앙과 삶
< 김영호 교수, 합신_신약학 >
재림의 임박성은 시간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이 과거와 현재에 이루신 사건에 있다
새 시대는 옛 시대와 공존하며 이미 시작됐고
장차 이뤄질 완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보이는 현실 앞에서도 부활과 재림 영광을 늘 눈앞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며 그 내용이 발현되는 장을 기도라 한다
세상의 끝은 언제 오는가? 사람들은 종종 질문한다. 삶이 지치고 힘들수록, 악과 어둠이 깊어질수록, 이 물음은 진지해진다. 지인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혹은 자신이 이 악의 피해자가 되거나 또는 심각한 위기나 죽음을 목전에 두면, 현실의 일부가 된다.
예수님은 왜 오시지 않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이 질문을 한다. 일차적으로 변증해야 한다. 단순히 “때”의 문제라기보다 우리 신앙의 내용 중 일부 또는 핵심이 틀리지 않았느냐 하는 공격이기 때문이다. “아빠, 예수님은 오신다 했는데, 왜 안 오셔? 아이들이 질문한다. “이스라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 10:23).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눅 9:27).
많은 아빠, 많은 엄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시원한 대답을 못한다. 물론 아이들의 질문은 어른들의 의식 속에서 진행되는 복잡한 논리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설명이 길어진다면, 플라톤의 짧은 단편 『파에돈』이나 『크리톤』을 기대한 아이에게 그의 『국가』나 『법률』을 읽어주는 격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잠시 멈추어 설 필요가 있다. 우리가 대답을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서 언어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반경이 그들보다 크지 않다는 반증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질문은 중요하다. 생각은 행동을 결정하는 출발점이기도 하고 그 사람의 삶이요 인생이기도 하다. “저리로서 … 오시리라.” 매주 고백한다. 이 고백은 보이지는 않으나 어떤 세계를 그려낸다. 어느 도시 어떤 사람을 말하면, 그 모습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따라서 성경의 기록, 신약의 주장, 예수님의 언어를 선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의 현실(reality)과 다른 내용을 가질 수 있고, 신약의 주장과 예수님의 언어와 공명을 일으키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성경적 종말론
그러면 성경이 제시하는 “현실”은 무엇인가? 종말은 예정에 속한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니라”(행 1:7).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느니라”(단 2:21). 인간과 세계의 마지막에 대한 것들, 특히 그 “시점”에 관한 것은 하나님 지식과 의지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얼마나 깊은지, 예수님께서 자신의 인성을 따라 한 말씀에 따르면, 심지어 메시야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어느 시 어느 때에 주님이 오실 것이다는 주장은 성경의 명백한 주장을 부인하므로 거짓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일에 대한 주장이므로 월권이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예, 뱅엘)의 연구에 들어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 이상이요, 신학자들(예, 슈바이처, 그래서)의 글로 교회와 학계에 들어와 있어 경계가 필요하다. 성경 종말론의 첫 원리, 그것은 종말이 하나님의 예정에 있다는 것이다.
종말은 임박해 있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 그 가지가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처럼, 이런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막 13:28-29).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하나님 나라가 곧 완성된다. 초대 교회는 이렇게 재림을 “임박하다” 의식했다. 역사상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도 임박성을 “시간”의 문제로 생각한다. 어느 “때”에 마지막 날이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 종말론의 첫 번째 원리에 어긋난다. “그 때와 그 시간”은 사람이 추측하여 알아낼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다. 나아가 예수님, 선지자, 사도들이 쓰던 시간 개념과 근·현대적 시간 개념은 같지 않다. 현대에도 많은 부분 그렇지만 고대에는 시간을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시간은 상대적이고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실체였다. 그래서 성경에서 동일한 마지막을 가리키면서도 날(들), 달(들), 해가 사용된다. 사람의 (심리적, 사회적) 시야에 이를 수 있으면 현재이고 그 밖에 있으면 과거나 미래이다. 이런 개념으로 하고 있는 “때”(시간)을 60분이면 1시간, 24시간이면 하루로 보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시간이 아니라, “어디”에서 임박성이 발생하느냐 물어야 한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임박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사건의 확실성 때문이었다. “너희 가운데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누가의 주장이다. 방식 차원에서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어 있다.
승천하신 그대로 다시 오신다. 하늘로 올리우시고 구름이 그 발아래 모이고 보이지 않게 되셨고 하나님 우편으로 가셨다. 그의 오심은 그 역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하나님 우편)에서 보이는 세계로 들어오시고, 구름을 타고 아래로 오신다. 사건 차원에서 과거와 미래가 하나를 이룬다. 승천, 그 이전 부활, 십자가, 고난, 지상생애, 성육신은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 사건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확실하다. 승천하신 것처럼 다시 오신다. 승천이 확실한 것처럼 다시 오심도 확실하다.
여기서 “임박성”이 발생한다. 승천이 눈앞에서 그림처럼 생생하듯이 재림도 생생하다. 승천이 부활에 근거하듯이 다시 오심도 부활에 근거한다. 여기서 “임박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지금 살아계신다(행 4:2; 고전 15:12, 14). 그의 이름이 교회에서 신자들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행 3:16, 21; 고전 15:25). 그분은 부활하신 결과 하나님의 통치권에 제한 없이 참여하신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거기서 “일어서 계신다”(행 7:55-56). 그리스도께서 교회에서 활동하시고, 신자들 삶에서 구체적으로 통치하시므로, 이 활동과 통치를 종말의 전조로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임박성”이 발생한다. 신약 임박성의 자리는 시간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이 과거와 현재에 이루신 사건에 있다.
종말은 현재에 들어와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4:17). 예수님의 인격과 함께 이미 와 옆에 있다(ἤγγικεν, pf). 하늘나라. “여기 계시지 않으시다. 살아나셨느니라”(눅 24:6). 부활. 언제 하늘나라가 오고 부활이 일어나는가? 마지막 심판 후 “오는 시대,” 죄와 악과 사망이 정복된 후 “새 시대.” 이것이 구약의 주장이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는 시대에 속한 일들이 이미 역사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예수님과 복음서 기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면 “현재 시대”는 어떻게 되는가? 파괴되는가? “오는 시대” (하늘나라)가 여기로 들어왔다고 하여 “현재 시대”가 없어지지 않는다. 대체되는가? “새 시대”(부활)가 출범하여 “옛 시대”를 바꿔치기하지 않는다. 두 시대는 공존한다. 이미 시작됐고 앞으로 이루어질 완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추수 이미지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추수의 시작을 알렸다. “이와 같이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도 …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유기적 개념이다.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셨고 신자의 부활과 피조물의 회복으로 완성된다. 그리스도의 부활부터 신자의 부활, 우주의 회복까지가 하나의 단위이며 하나의 “종말시대”인 것이다.
성경적 종말론이 요구하는 삶
종말은 하나님의 예정에 속하고, 임박했으며, 현재에 들어와 있다. 이 사실들 전부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의 기초이다. 이 종말론은 어떤 삶을 요구하는가? 신자는 “종말이 현재에 이미 들어와 있고 완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으며, 그 끝이 임박했으나, 그 시기와 때는 하나님만 아신다”는 성경적 “시대관”에 맞게 살아야 한다. 이 사실이 명백해 보이는데, 그렇게 살지 않는 경우도 있는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신자는 현시대와 오는 시대의 공존 시대에 사는데 현시대는 보이며, 대체되거나 파괴되지 않았으므로, “권력”을 갖는다. 오는 시대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현실성을 인식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간단치 않다. 그러므로 성경은 보이는 것대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종말적 의식이 반영된 삶은 어떤 모습인가?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눅 12:40). 준비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안다. 예상과 다를 수 있지만 2경이든 3경이든 주님은 오신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도둑이 언제 오는지 알고 있는 집주인과 같다.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우선 행동이 아닌 생각의 문제이다.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행동이 나온다. “남녀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신다”(눅 12:45).
일상의 지향점을 주님의 부활과 재림 영광으로 삼아야 한다. “인자의 날은 번개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서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라 …”(눅 17:24-29). 여기에 “예수님의 다시 오심/사람들의 일상”이 함께 나온다.
그런데 중간에 인자의 고난에 대한 말씀이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예수님의 변형된 수단예고 공식이다. 그런데 삼일 만에 부활하리라는 부분이 빠져 있다. 그 자리에 인류의 일상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일상이 부활과 재림의 영광의 배후에서 진행되는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공존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이 사실보다 자주 잊는 것은 없다.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공존의 시대는 주님 부재의 시대처럼 보인다. 마치 불의한 재판관 앞에 있는 과부의 처지와 같다. 현실이 모두 반대하더라도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는 이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이가 가진 믿음의 내용이다.
“현시대”의 구조에 순응해서는 안 된다. “이 세대(현재 시대)를 본받지 말라.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롬 12:2).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신자는 “현시대의 구조와 동일한 구조가 되어서는 안된다.” 신자는 이미 오는 시대에 속한 자로서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두 시대 사이에 신자가 있다. 현시대의 구조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익숙한 것들이므로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멀리하기 어렵다. 가만있으면 현시대의 구조에 들어가게 된다.
지금은 “종말 시대”이다. 십자가와 부활 이래 구약이 예언하고 선지자들이 고대한 나라(“새 시대,” “오는 시대”)가 이미 출범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한 신자는 이미 “그 나라에만 존재하는” 의와 생명과 평화를 현재에 누리고 사는 이들이다. 새 시대 백성이요 하늘나라 시민인 것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마치 무명의 랍비와 12명이 시작한 천국 운동처럼, 정원에 심긴 겨자씨와 같은 현실일 수 있다. 그래서 이 현실을 증거로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대로 있지 않느냐?”(벧후 3:4).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세에 기롱하는 사람들이다”(벧후 3:3). 이들이 다수요 이들이 세력이다. 여기에 신자의 갈등이 있다. 물리적으로 보이는 현실 앞에서도 부활과 재림 영광을 늘 눈앞에 두고 살아가는 것, 이것을 주님은 “믿음”이라 부르고, 그 내용이 발현되는 장을 “기도”라고 부른다(눅 1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