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폭설의 무게에도 쓰러지지 않는 푸른 잣나무
윤여성 목사(수원노회 열린문교회)
몇 주 전 폭설이 내렸다. 곳곳에 큰 피해도 남겼다. 하지만 나는 막 첫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할 그때에는 마치 강아지처럼 좋아했었다. 내가 목회하는 대단지 아파트들에는 화려한 정원이 많은데, 정원들을 몇 곳이나 소년처럼 돌아다니며 내리는 눈을 즐거워했다. 화려한 오색 단풍잎의 찬란함이 아직 남아 있던 가을 정원이 이번엔 하얀 폭설로 덮여 마치 천상에서나 볼 듯한 대단한 광경들을 연출했다. 저 북쪽 지역인 삿포로나 하얼빈에서도 볼 수 없을 그런 아름다움의 기억을 선사해준 것이다. 눈부시게 아름답던 그 산책길들을 걷는 호사를 누리던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생생한 기억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며칠 후 모교를 방문했다. 우리 합신 동산은 큰 눈이 내린 뒤 일주일이 지났지만 그대로 눈으로 뒤덮인 모습이었다. 동행자와 박윤선 목사님 묘소를 방문하려고 잠시 뒷동산에 오르기로 했다. 합신 뒷동산에 오르다 보니 이번 겨울 폭설로 인해 푸른 잣나무들이 쓰러져 있었다. 오르는 길이 미끄러워 위험하지는 않을까 염려도 했었는데 오히려 다른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주간에 내린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푸르른 잣나무의 가지들이 찢겨나가 박윤선 목사님의 묘소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곳에 가로놓여진 찢긴 가지들을 치우며 간신히 오를 수 있었다.
지난 주간 내가 아파트 정원에서 만끽했던 그 아름다움과 선명한 설국의 장관과 대비된 이 산길의 광경이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의인을 푸른 감람나무에 비유한 성경 말씀이 생각나서 늘 좋았던 우리 학교의 뒷동산이었다. 그런데 이번 폭설로 그 잣나무들은 여지없이 망가져서 가지들이 찢겨 나뒹굴고 있었다.
겨울 폭설의 무게에 찢기고 쓰러진 그 잣나무들 사이를 오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우리 교단이나 한국 교회 현실에 관한 상념들이다. 진리의 푸르름으로 우리 교단이 한국 교회에 나름 진리의 빛을 남달리 발하던 지난날이 있었다. 그런데 혹시 우리 합신 교단이 이 시대의 거센 공격에 넘어져 길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한국 교회의 부흥기에 한때 화려해 보였으며 진리의 빛을 발하던 중에 현세적 물질주의 가치관으로 인한 비 진리의 도전으로 시련기를 맞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한 향기와 고고하던 가치를 잃고서 타협하며 흩어져가지 않았는가? 마치 화려한 단풍 위로 쏟아져 내린 폭설로 푸르르던 가지들이 꺾여버리듯, 오늘 우리가 겉으로 나타난 세상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기다 폭설의 무게에 휘청거리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한 자각과 슬픔이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짓눌러 왔다. 그리고 진리를 외치던 우리의 교수님들을 생각하게 하였고, 또 의를 위해서 받는 핍박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선배들을 생각하게 하였다.
그렇게 박 목사님의 묘소에 도착해 잠시 마태복음 6장 34절 말씀을 묵상하고 되돌아왔다. 묘소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은 잣나무 가지들을 치우고 길을 내면서 가야 했던 그 길이 나에게는 좋은 메시지가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 교단과 학교가 걸어가야 할 진리의 좁은 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