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인물: 희대의 도예가 빨리쒸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제공(대표 : 조병수 박사)
빨리쒸는 위그노 신앙을 고수하다가 80세의 나이에 바스티유 감옥에서 학대를 받다가 굶어죽었다. 간수장은 빨리쒸의 시신을 자신이 기르는 난폭한 경비견들에게 던져주어 뜯어먹게 하였다.
베르나르 빨리쒸(Bernard Palissy, 1510-1590)는 일찍부터 유리 채색, 도자기 채색, 토지 측량 같은 일을 하던 중에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도예의 세계로 빨려들었다. 특히 이탈리아와 중국에서 생산된 백색 유약을 입힌 도자기들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아 동일하게 재생해보려는 마음을 먹었다. 빨리쒸는 이 일을 하는 데 거의 16년에 가까운 세월을 드렸다. 가난한 형편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땔감을 구할 수가 없어서 울타리와 말뚝을 빼다가 땔감으로 썼고, 심지어는 가구며 마루며 화목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화덕에 던져 넣었다. 그 바람에 빨리쒸는 동네 사람들뿐 아니라 그의 아내에게까지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오랜 가난과 비난 끝에 자신만의 작품인 “전원풍 도자기”를 완성해냈다. 시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생물을 올려놓은 넓은 쟁반은 그의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1542년, 소금에 과도한 세금을 부여한 것 때문에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몽모랑시 공작이 군대를 이끌고 왔다가 빨리쒸의 도자기에 깊은 인상을 받고는 자신의 성채를 장식하는 일을 맡겼다. 이런 작업이 진행 되는 중 빨리쒸는 가톨릭을 떠나 위그노 신앙을 받아들였다(1546년). 빨리쒸는 몽모랑시의 보호 아래 1548년 파리로 이동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모후 까뜨린느 메디씨는 루브르 궁전 서쪽에 짓는 뛸르리 정원을 도자기로 장식하기 위해 빨리쒸가 위그노임을 알면서도 궁정 도예가로 임명하였다. 세 아들이 일을 도왔다. 빨리쒸는 자신이 위그노임을 만방에 거리낌 없이 표명하였고, 때때로 성경을 인용해서 당시의 고위급 관료들과 가톨릭 사제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빨리쒸는 도예가의 삶이 깊어지자 “흙의 예술가”로 자처하면서 자연스럽게 물, 흙, 금속에 과학지식을 곁들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여러 과학 주제에 관한 강의를 열었고, 인문학자와 과학자들이 참석하여 친구가 되었다. 빨리쒸는 누군가가 자신의 설명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면 상을 주겠노라고 장담하였다. 물의 순환에 관해서 처음으로 말한 사람이 빨리쒸였다. 당시에는 수많은 강물이 바다로 유입되고 다량의 강우가 더해지는데도 바닷물이 넘치지 않는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그는 1580년에 물의 성질에 관한 경이로운 강의를 발표하여 바닷물이 범람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빨리쉬는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한다”(전 1:7)는 말씀이나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다”(렘 5:22)는 말씀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수천 명의 위그노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바뗄레미 대학살(1572년 8월 24일)이 벌어지기 직전에 빨리쒸는 위그노 영주 들라마르크의 보호 아래 있는 스당으로 옮겨갔다. 덕분에 빨리쒸는 독실한 위그노임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빨리쒸를 존중하던 모후 까뜨린느가 장차 벌어질 일들을 내다보고는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빨리쒸는 이태가 지나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 위그노 신앙을 가지고 활동하다가 끝내 1588년 가톨릭 동맹의 광신도들에게 체포되어 바스티유 감옥에 던져졌다. 몸을 통째로 불살라버리겠다는 위협 앞에서 빨리쒸는 비웃으며 “나는 하나님의 불이 더 무섭다”고 말했다.
국왕 앙리 3세가 감옥으로 찾아와서 위그노 신앙을 철회하고 다시 가톨릭 미사에 참여하면 석방은 물론이고 복권을 시켜주겠노라고 제언하자, 빨리쒸는 “아무것도 나를 강요할 수 없소. 나는 어떻게 죽을지 알고 있소”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순교의 길을 갔다. 위그노 지도자 앙리 4세가 파리를 빼앗기 위해 공성하고 있을 때였다. 희대의 도예가는 예술을 버리고 예수를 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