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법은 약자를 세우기 위해 만들었거늘_남웅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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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약자를 세우기 위해 만들었거늘

남웅기 목사(바로선 교회, 본보 논설위원)

국가의 법규(法規, 법률과 규칙)는 존중받아야 하고, 국민은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단마다 헌법이 있고, 노회마다 규칙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조직의 운영과 질서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수단일 뿐이다. 법규를 지킨다는 건 결코 교회가 추구할 목적 가치는 아니다. 정말 중요한 가치를 외면하면서까지 법규준수에 매달릴 건 아니란 말이다. 그러므로 법규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목적 가치(입법 취지)를 훼손해서도 안 되고, 법규를 준수한답시고 억지와 무리수를 쓰면 안 된다. 그것이 국가라면 몰락의 징후가 되고, 교회라면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사실이 그러하듯이 법규는 더욱 해석과 적용이 관건이다.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살릴 것을 죽이기도 하며, 죽을 것을 살릴 수도 있는, 전혀 상반된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 콩트 한 토막을 소개한다. 어느 지방자치 단체에서 조례 하나를 만들었다. 입법 취지는 물론 젊은이들에게 노후의 부모를 공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월수입 500만 원 넘는 자녀는 결혼 후 평생을 키워준 부모님 통장에 매월 수입의 10분지 1을 자동입금하도록 권장하고, 이에 그 자녀가 동의하면 ‘자랑스러운 부모’라는 표찰을 대문에 달아주자는 조례였다. 물론 개중엔 500만 원 이상이 돼도 ‘난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많아 한 푼도 주기 싫다’는 이들도 나타났다. 그런데 월수 300만 원밖에 안 되는 자녀가 뜻을 모아 매월 30만 원을 드리기로 작정하고 시청에 신고했다. ‘우리 부모는 비록 가난했지만, 자랑스러운 부모’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곤 부모님 집 문패에다 자신이 직접 ‘자랑스러운 부모’라는 표찰까지 만들어 내걸었다.

근데 뜻밖에도 봉변을 당했다. ‘저 사람은 조례를 어긴 사람이라’고. ‘효도도 좋지만 위법을 해선 안 되지 않느냐?’ 는 거였다. 뜻밖에도 주동자들은 월수 500만 원 이상의 소득자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었다. 그러자 그 조례를 만든 군 의원들도 들고 일어났다. 군의회 의장에게 질의했다. ‘저 자녀의 불법 여부를 판단해 달라’고 말이다. 그때 군의회 의장은 이렇게 답변했다고 한다. ‘법대로 하면 됩니다. 법은 만인이 지켜야 합니다.’ 물론 웃자고 지어낸 말이지만,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산다면 정말 숨 막힐 일이다. 정녕, 효도 정신을 드높이기 위해 그런 조례를 만들었다면, 군 의회는 300만 원 소득의 자녀를 칭찬하고 격려하여 다른 자녀들에게 본이 되도록 해야 옳다. 준법을 강변하며 진정한 효자를 욕보인 군 의회라면 그 지방자치단체는 봉숭아학당이 따로 없다.

지금 가을 노회를 앞두고 있다. 노회마다 은퇴 목회자들은 쏟아지고 원로목사 추대 여부는 교회마다 초미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교회가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된다면, 적어도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진액을 쏟고 물러나는 전임 목회자에게 일정 부분 노후를 지원해 드리도록 하자’는 게 교단 헌법의 입법 취지라면, 우리 이제 원로목사 추대 자격의 적용 범위에 대해 인색해하지 말자. 조직교회와 미조직교회의 구별은 교단 행정상의 필요에서 나눈 것에 불과하다. 본질적인 교회의 정체성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렇다면 ‘미조직교회는 교회가 아니다’고 더는 강변하지 말자, 만일 조직교회 목회자들이 그것을 고집한다면 그건 또 다른 형태의 목회적 갑질이 될 수도 있다. 노회는 비록 시무 연한이 20년이 채 안 된 경우라도 그 교회의 품격 높은 지도자들을 만나 설득할 능력을 보여야 한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돈이 중요한 건지, 주의 종의 뒷모습을 영광스럽게 해주는 것이 중요한 것인지 가르칠 책무가 있다.

그렇지 않고 노회 동료에 대해서마저 법을 내세워 그리 야박한 유권해석을 한다면, 약한 자와 병든 자를 돌아보고 세워 주어야 할 우리의 거룩한 책무를 어디에서 드러낼 수 있겠는가 말이다. 법은 지키는 게 맞다. 그러나 그 법을 지키려다가 무언가를 망가뜨리거나 누군가를 실족하게 할 것 같으면 그 법을 초월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경우가 바로 특별상황이고, 비상상황이다. 주일예배에 참석하려고 가다가 죽어가는 사람을 보거나, 나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면, 살림의 책무를 위해 교회에 빠진다 해도 그건 주일성수 위반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때 만일 주일을 핑계하고 그냥 지나친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사들이요, 강도 만난 이웃을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 인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입법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법만 내 세운다면 교회에서 더 이상 복음이 주는 살림의 역사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목회자에게 섭섭한 점도 있을 수 있고, 목회자의 부족한 면도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떠나는 목회자를 명예롭게 만들어 줄 책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그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교회의 축복의 밑절미이기 때문이다. 못난 부모, 무능한 부모라고 그 자녀의 불효가 용납되지 않은 것처럼,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교회 목회자이든, 아쉬운 목회자이든 하나님을 생각하며 떠나는 목회자에게 각별히 예우를 갗추는 건 지혜로운 성도의 마땅한 자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