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골 아침사색|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신자의 운명’ _변세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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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신자의 운명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교회는 역사의 무대에서 교회다움을 과시하면서 계속 달려날 수 있기를

 

아침, 저녁의 서늘함에 더위가 기세를 잃어가고 여름이 기울어가고 있다. 잠자리가 하늘 높이 나는 것을 보니 이제 완연한 가을로 접어드나보다. 어디서 불어오는 한 줄기 실바람 때문인지 풀벌레 떼창 소리에 발바닥이 간질거리는 느낌이다. 

별들은 같은 괘도를 계속 돌고 있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해놓으셨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시에 이 모든 법칙들을 정해놓으셨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처음부터 평등한 관계로 창조되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인격적으로 억압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상호간에 지켜야 할 질서는 있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계급이나 신분상의 차이는 없다.

남편과 아내사이, 부모와 자녀사이, 상전과 하인사이에도 유지되어야 할 질서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질서가 계급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세계에서 오늘날처럼 마치 신분이나 계급의 차이가 상례화 된 것은 근본적으로 죄로 말미암는다.

죄의 일차적인 기능이나 능력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반원리들을 깨뜨리거나 왜곡시키는데 있다. 남편이 힘을 앞세워 아내를 마치 종처럼 부린다거나, 부모가 자녀들에게 또한 그렇게 하고, 사회나 직장의 경제 영역에서 돈을 권력처럼 행사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계급구조가 자리 잡게 된 것 등은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인간계의 모습이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마치 성경의 경제원리인양 기독교 안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지극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기독교 경제원리라는 주장은 아니다. 기독교 경제원리는 명백히 자발적 공유주의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구약역사의 실례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는데, 즉 만나가 공동으로 분배되었다거나, 면제년 제도와 묶여있는 안식년제도 그리고 희년제도 등이 이것을 가르쳤고 그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교회가 출범하게 되었을 때, 그 두드러진 모습이 공유하는 삶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세월이 흐르면서 휴머니즘이 발달하고 점점 더 계몽사회가 됨에 따라, 겉보기에는 약자의 인권보호나 자유회복 문제가 상당히 발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지배세력의 부상 앞에서 여전히 또 다른 형태의 예속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죄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세계에서의 지배 및 예속현상은 시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반복 될 것이다. 빈부의 격차가 재물, 권력, 기술, 학력 등등의 모든 영역에서 터무니없는 정도로 벌어지는 현상과 그로 말미암은 부의 편중 현상은 단순한 경제논리나 구조상의 문제로만 치부될 수 없는 것이고, 반드시 그러한 경제 원리로만 몰아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곧 죄의 권세가 역사하는 차원에서 설명되어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차이가 적어도 교회 안에서만큼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근본적으로 죄의 권세를 벗어버린 존재들, 곧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들로 다시 창조된 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렇게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은 자들로 변화된 모습을 가장 웅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어떤 모습이겠는가? 그것은 같은 지체들 간에 죄의 권세를 벗어버린 자다운 생명력의 활발한 교환일 것인데, 이것의 두드러진 현상으로 경제적 평등, 공유주의의 왕성한 지배력도 들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근본적으로 그러한 존재이다. 교회 안에도 당연히 질서는 존재하고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행여라도 그것이 지배계급처럼 행사되면 안 되는 것이다. 가령 목사와 일반 성도 간에, 또는 교회의 각 직분자들 간에 어떠한 계급적 차이도 있을 수 없다.

성도란 서로간의 ‘분별이 있을 수 없다’고 한 바대로, 서로간의 차별을 벗어버린 평등한 자들이다. 물론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차별 없는 삶의 특성은 공유주의로 표현되는 것 못지않게 다방면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즉, 많이 가진 성도가 적게 가진 성도에게,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고, 또한 상호간에 진실한 지체관계를 유지하는 일, 곧 각종 미덕발휘는 물론이고 상대방의 허물을 용납하고 사랑까지 베푸는 것도 있어야 한다.

성도의 모든 신앙생활은 항상 이렇게 자신에게 베푸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애절한 심정으로 느끼고 그에 보답하는 토대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스스로 외톨이를 자처하거나 반대로 독불장군 노릇을 못하게끔 되어있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구성된 생명력 자체가 상호간의 상합과 연락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방팔방에서 사랑이 점점 사라지고 불법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여기에는 교회라고 해서 자유롭지 않다. 교회에서조차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은 교회의 두드러진 속성이 소멸되는 현상이기에 여간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다.

성도의 특성은 서로 사랑하는데 있다. 물론 이 사랑이란, 성도들 상호간에 거듭난 본성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왕성하게 이루어내는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서로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목표가 뚜렷할 때만이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을 옷 입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혐의가 있는 자도 기꺼이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사랑까지 베풀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능력이 공동체 안에서 활발하게 역사하는데서 교회는 비로소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온 세상에 드러내게 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역사의 무대에서 더 더욱 교회다움을 과시하면서 시간세계를 계속 달려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적극적인 선이 사랑인 것을 알아야 한다. 옆에 있는 이웃에게 내가 깊은 존재가 되어 그렇게 옆 사람과 지체의 관계를 이루어가야 한다. 어떤 윤리와 법에 매달려 대상 없이 사심 없는 원칙만 남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창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무성함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자라나야 한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똑바로 마음을 먹고 시작하면 된다. 심지어 우리 자신의 못남 때문에 일어난 모든 일까지를 통틀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운명을 우리가 가진 진정한 사랑으로 완성해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