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回想)과 회복(回復)
김수환 목사 (새사람교회)
실상을 직시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전보다 더 큰 영광으로 회복시키실 것
인류 역사와 문명은 과연 발전하는가? 언뜻 보면 그래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마치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는 어떤 상인들의 말처럼, 현대문명과 역사발전의 이면에는 또 다른 부정적이고 퇴행적인 면이 숨어 있다. 선한 목적을 갖고 노력한다고 반드시 선한 결과만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우리의 문명과 역사가 저절로 향상되고 발전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우리 합신의 나이가 벌써 40이 되었다. 사람의 나이가 40이 되면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불혹의 세대여야 한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40년이 지났을 때 광야생활을 마감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입구에 당도해 있었다.
과연 하나님 앞에서 40년이 지난 우리 합신의 모습은 어떤 평가들이 가능할까? 개혁교회 역사 발전에서 40번의 생일을 맞는 우리 합신의 위상은 어떤 의미들이 있을까? 합신교단이 창립되고, 합동신학교가 개교한 후, 몇 년이 지난 무렵 교계와 사회의 안팎으로부터 받은 과분한 격려와 성원은 우리를 매우 들뜨게 했다. 매해 신학교 지원율은 기대 이상이었고 교단은 풋풋한 햇과일처럼 얼룩진 교회들을 갱신하기에 유일해 보였다.
외형적으로 너무 작고 왜소했지만 교계와 사회로부터 대단한 주목을 받았고, 우리는 그런 분위기에 적지 않은 자부심과 긍지를 가졌다. 합신을 졸업하고 합신교단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마냥 자랑스러웠고 가슴 뿌듯했다. 어디에 가서든 누구를 만나든 우리의 신분과 소속을 자랑스럽게 얘기했고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부러워하는 듯 했다.
그런 가운데 어떤 자들은 이런 우리 합신의 이미지를 이용하려는 희한한 일들까지 생기기도 했다. 즉 우리 교단의 이념이나 개혁에 대한 마인드가 전혀 없으면서도 흐릿한 자신의 과거 신학 이력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서 합신에 입학을 하고 교단에 가입하는 현상들이 생기기도 했다. 물론 그런 자들은 우리의 정체성에 적응하지 못해서 결국 교단을 떠나갔지만 기존의 자기 신학과 교단의 이미지를 우리 합신을 통해서 바꾸려 했다. 마치 정치인들이 은행을 통해서 자금을 세탁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나 다름없는 ”우리는 다르다“라는 말에 ”무엇이 다르며, 사당동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라는 회의적 반응들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우리 바깥에서가 아니라 우리 내부로부터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가짜뉴스처럼 아무 근거 없는 말들을 고의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건 바로 우리들의 실상이었다.
합신을 졸업하고 우리 교단의 멤버가 되는 순간, 이미 완성된 개혁의 자리에 안착해 버리기라도 한 듯한 착각을 하지 않았나 하는 회의감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물론 사당동에서 아무런 대책 없이 빈손으로 나와 땅을 마련해서 교실을 짓고 교단의 외적인 기틀을 다져 가는 일들이 너무 벅찼고, 그래서 사당동에서 나온 우리의 본질과 정신이 잠시 보류되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자위하기에는 이제 40이란 나이는 너무 많아 보인다.
내용을 담을 그릇을 만들기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우리의 본질이 등한시되었던 것일까. 우리는 합신맨이 되는 것으로 만족했고 거기에 너무 깊숙이 안주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떨쳐낼 수가 없다. 바울 사도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2)“고 했다. 또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했다.
개혁적 신학(신앙)은 자전거와 같다. 페달을 밟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지 않고 멈추는 순간 넘어지고 만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부패했고 우리의 신학적 깨달음과 실행도 여전히 불완전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잠시도 안주할 수 없고 안주해서도 안 된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정진만이 사는 길이다.
물론 우리가 노력하고 애를 쓴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자비가 선행되고 전제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 인간은 노력을 해도 절망이요 노력을 안 해도 절망이다. 과거를 회상해도 절망이요 미래를 전망해도 절망일 뿐이다. 그러나 그 절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을 때 그 절망은 소망으로 바뀐다.
치료는 자신이 환자라는 자기인식과 함께 시작된다. 나는 감히 우리의 못내 아쉬운 모습을 ‘신학의 엘리트주의로의 안주’라는 용어로 갈무리하고 싶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실상을 직시하고 그리스도를 더 굳게 붙잡고 그리스도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실 뿐만이 아니라 이전 영광보다 더 큰 영광으로 회복시키실 것이다.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애가 3: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