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저마다의 아칸소 들판에서
민현필 목사(함께하는교회)
우리에겐 무한한 샘의 근원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선물인 가족이 있다
올망졸망한 어린 두 자녀들과 젊은 부부를 실은 한 대의 차가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다. 자장가처럼 부드럽고 한편으론 서글프기도 한 서정적인 테마 곡이 함께 흐르면서 영화 ‘미나리’는 그렇게 시작된다. 별 생각 없이 영화의 서두를 응시하던 나는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순식간에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2시간이 20분처럼 훌쩍 지나갔다.
이 가족이 도착한 곳은 미국 아칸소 주의 광활한 시골 들판. 집이라고는 고작 기다랗고 허름한 트레일러 하나가 전부인 곳. 이들은 이제 뭔가를 새롭게 시작할 터였다. 80년대 말 서울 올림픽 이전 대한민국은 매년 수만 명의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 가족처럼 미국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직면해야 했던 현실은 꿈처럼 달콤하지 않았다.
110여 개의 각종 시상식에서의 수상과 더불어 최근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까지 빛나는 영화 ‘미나리’는 60-70년대 당시 청운의 꿈을 품고 도미했던 우리 선배들의 고단한 삶의 단면을 담담한 어조로 잘 풀어 낸 작품이다. 등장인물은 가부장적인 젊은 아버지와, 남편과 자식들을 건사하며 인내와 사명감으로 꿋꿋하게 가정을 꾸려 나가는 아내, 그리고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친정 엄마 순자(윤여정 분).
아버지 제이콥은 캘리포니아에서 아내와 함께 병아리 감별사로 모은 돈으로 새롭게 농장 사업을 시작한다. 자식들 앞에서 뭔가를 이뤄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필사적으로 농장을 일궈간다. 하지만, 샘을 파는 것부터 작물을 재배하고 수확한 열매들의 판로를 개척하는 것까지 모든 순간이 살얼음판처럼 위태롭고 어려운 순간들에 직면한다. 그 때마다 제이콥은 가족들에게 내색하지 않은 채 홀로 외롭게 그 시간들을 돌파해 나가고, 은행 빛은 쌓여만 간다.
그 시간들이 너무 고단하고 힘겨웠기 때문일까. 아내 모니카(한예리 분)는 더 이상 아슬아슬한 삶을 견딜 수 없다며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병아리 감별사 일을 하겠노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남편 제이콥에게 가족과 돈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이제 막 수확한 작물들의 판로가 열린 상황 속에서 그런 아내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언은 제이콥을 혼돈스럽게 한다. 설상가상으로, 척박한 농장 생활 속에서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의 일부가 마비되는 증상으로 고생하던 친청 엄마 순자는, 딸 모니카의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 있은 그 날, 실수로 수확한 작물들을 쌓아 두었던 창고에 불을 내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그 동안의 모든 수고의 열매들을 잃어버린 제이콥과 가족들. 그러나 그 절망의 순간에 가족들은 서로를 구출해 낸다. 그리고 영화는 새롭게 시작된다. 고단한 이민 생활 속에서 서로를 지켜주기로 약속했던 젊은 두 부부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망각한 채, 어메리칸 드림을 이뤄내고 말겠다는 집념에만 사로잡혀 살아왔던 제이콥은 그제야 돈보다 더 소중한 보석 같은 가족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리고 다시 샘을 파기 시작한다. 영화 서두와는 달리 이제는 아내와 함께. 그래서 영화는 결코 새드 무비로 끝나지 않고, 묘한 희망의 아우라를 남기며 그렇게 막을 내린다.
아칸소의 광활한 들판을 혼자서 일궈내려 했던 무모한 제이콥. 그리고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과 고독 속에서 나는 사역 초년병 시절의 내 모습을 얼핏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난 십수년 간의 사역의 여정들이 영화처럼 내 뇌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밤이 맞도록 수고했지만 얻은 것이 없었던 제자들처럼, 나 또한 그런 허무와 절망감 속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제이콥의 가정이 살아내야 했던 아칸소의 그 광활한 들판과 허름한 트레일러의 삶이 지금 내가 서 있는 광야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묘한 위로를 느꼈다. 문학이나 영화와 같은 내러티브가 지닌 힘과 상상력이란 이런 것이리라.
우리는 어쩌면 저마다의 아칸소 들판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무한한 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가족이 있다.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견뎌야 할 나의 아칸소를 풍요롭게 일궈낼 희망의 미나리. 그 씨앗은 어쩌면 내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면서도 그 비범한 가치를 눈치채지 못했던 가족 안에 담겨 있지 않느냐고 영화 ‘미나리’는 내게 속삭이는 듯하다.
지난 사역의 시간들 동안 나는 분명 탁월치 못했고, 청년 때의 열정과 헌신은 불태워진 제이콥의 창고처럼 허무한 재와 연기가 되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런 절망감이 밀려올수록 함께 기도하며 견디어 내는 가족이라는 선물은 내게 더 없이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보는 눈이 서서히 열려져 왔다는 점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