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교회사 이야기(4)] 루터가 발견한 ‘하나님의 의’_안상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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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발견한 ‘하나님의 의’

안상혁 교수(합신, 역사신학)

루터는 로마서 안에서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새로 태어나 천국의 기쁨을 누려

1. 환향녀(還鄕女) 이야기

1636년 12월 청나라의 홍타이지 장군은 십 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은 패했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행해야만 했습니다. 왕자들은 볼모로 잡혀갔습니다. 조선의 많은 여인들도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돌아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의미에서 이들을 가리켜 “환향녀”라고 불렀습니다. 저마다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지고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건만 뜻밖에도 고국은 이들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이들을 냉대했습니다. 양반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지 않은 죄를 물어 아내와 딸 그리고 며느리들을 집안에서 내쫓기까지 했습니다.
사태가 이쯤 되니 정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좌의정 최명길이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환향녀들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민족의 비극 앞에 책임을 통감한 인조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임금이 내린 교지(敎旨)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으로 들어오는 길에 흐르는 홍제천에서 몸을 씻고 돌아오는 모든 환향녀에게는 과거를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부정한 과거가 씻겨졌으니 기존의 신분이 회복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홍체천의 본을 따라 전국 곳곳에 회절강(回節江)이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2. 중세 말 유명론의 칭의 교리

환향녀 이야기는 중세 유명론의 칭의론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동전 비유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크기와 모양이 똑 같은 금화와 납화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비록 유사한 모양이지만 가치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쟁과 같은 국가적 위기를 만났을 때 중세 서유럽의 국왕들은 종종 다음과 같은 한시적 조치를 취했다고 합니다. 금화나 은화의 품귀현상에 대한 타개책으로서 납화에게 금화의 가치를 부여하여 시장에 유통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나라 경제가 정상화되면, 손해를 보상하겠다는 약속이 덧붙여졌습니다. 납화의 입장에서는 국왕의 명령에 의해 하루아침에 금화의 신분을 획득하는 셈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러한 예가 종교개혁의 칭의론을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언뜻 보면 한 나라의 국왕이 직접 나서 자신의 권위로 백성의 허물을 덮어준 역사적 시례나, 상기한 유명론의 동전 예화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용서를 연상케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루터가 성경에서 발견한 칭의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성도가 누리는 것은 환향녀가 경험한 용서나 납화가 경험하는 가치의 변화와는 다릅니다. 무엇보다 인조의 조치에는 그 어떤 대가지불이 생략되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납화를 금화로 둔갑시키는 국왕의 선언에도 실재(實在)적 근거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 칭의의 확실한 근거!

루터에 따르면,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신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닙니다. 말 뿐인 선언이라면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분으로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납화인데 그것을 금화라고 부르는 셈이니까요. (오늘날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논리로 개신교 칭의론이 약점을 가진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는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루터는 로마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를 발견했습니다. 이때 루터는 마치 새롭게 태어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기쁨을 누렸다고 고백합니다.

밤낮으로 본문[롬 1:17]의 의미를 묵상하는 가운데 마침내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의’가 어떤 맥락에서 기록되었는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즉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본문이 말하는 의인들이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 생명을 얻게 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의 진정한 의미였습니다. 이것은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시고 이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는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시는 칭의의 의인 것이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은 바로 이 진리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저는 제가 완전히 다시 태어났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제 앞에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는 느낌을 얻었습니다. 이를 통해 성경 전체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의 의’를 (한때 제 가슴 속에 품었던) 미움이 아닌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가장 달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신자는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에게 전가(imputation)됩니다. 이처럼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선언되는 칭의는 결코 거짓말이 아닙니다. 루터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칭의의 복음을 깨달았을 때 그가 발견한 복음은 말 그대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