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설교
야곱이 아니라 얍복입니다
<이유환 목사 | 열린비전교회>
제자의 본질은 ‘나와 우리’가 왕좌에서 내려오고 ‘예수님’을 왕좌에 모심
잃어버렸던 겸손과 정결과 정직을 회복하라는 명령에 온전히 순종해야
두 질문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살아야 할 ‘그 자리’를 떠난 아담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 선하고 아름답게 동거하는 ‘형제의 관계’를 깨뜨린 가인을 깊은 탄식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불경건과 이웃을 향한 불의라는 ‘두 죄악’에 대하여 진노하십니다.(롬 1:18)
십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라는 ‘두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두 계명’을 주셨습니다.
진정한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진정한 목회자(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두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울처럼 ‘주님, 누구십니까’ ‘주님,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두 질문’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행 22:8,10) 우리가 품어야 할 ‘두 비전’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 영혼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움켜쥐려고만 했던 ‘야곱’(야코보)으로 하여금 비워낸다는 의미를 지닌 ‘얍복’(야보코)을 통과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는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원수였던 형 에서와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아가 형제(이웃)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빚어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두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지금 너는 어디에 있느냐? 지금 너의 형제는 어디에 있느냐?’
죄의 본질과 제자의 본질
아담 이래 모든 죄의 본질은 ‘자기중심성’입니다. 온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기를 바라는 교만과 욕망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나 중심성’이라면 현대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중심성’입니다.
제자의 본질은 ‘자기 부인’(자기 죽음)입니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듯이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나와 우리’가 왕좌에서 내려오고 ‘예수님’을 왕좌에 모시는 것입니다.
‘담임목사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성도 중심의 교회’로, ‘우리 교회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다른 교회와 어깨동무하며 나아가는 교회’로,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교회’로, ‘교회 중심의 선교’가 아니라 ‘현지인 중심의 선교’로 나아가는 것이 교회의 자기 부인입니다.
세상 나라(제국)는 내가 살기 위하여 너를 죽이는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너를 살리기 위하여 내가 죽고 결국 함께 사는 나라입니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살고, 교회가 죽어야 선교가 살며, 선교사가 죽어야 선교지가 살고,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삽니다. ‘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예수님은 흥하셔야 하리라!’(요 3:30)
키우는 기쁨보다 세우는 기쁨
성경에는 ‘두 성’이 나옵니다. ‘큰 성 바벨론’(계 18:10)과 ‘거룩한 성 예루살렘’(계 21:2)입니다. ‘큰 성 바벨론’은 힘이 신의 자리에 오른 세상(합 1:11)이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시는 나라(합 3:19)입니다. ‘큰 성 바벨론’은 크기(size)와 속도(speed)와 성공(success)을 추구하는 세상이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본질(substance)과 느림(slowness)와 섬김(service)을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람’을 부르실 때 그 이름의 뜻은 ‘높은 아버지’였고, 주신 약속은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창 12:1-2) 그러나, 이 약속의 본질은 그저 거대한 민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후에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 주심으로써 약속의 본질을 더욱 분명하게 해주셨습니다.(창 17:5)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확대’가 아니라 ‘확산’이었습니다. 죄인들이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를 온 세상에 퍼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창조명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을 넘어 온 땅에 ‘충만’한 것 곧 흩어져서 온 땅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리라 약속해 주셨습니다(행 1:8).
교회에는 ‘더하기 교회’와 ‘곱하기 교회’가 있습니다. ‘더하기 교회’는 교인 수가 늘어나 규모가 커지는 교회이고, ‘곱하기 교회’는 성도들을 세상 곳곳으로 파송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는 교회입니다. ‘더하기 교회’에는 교회를 키우는 기쁨이 있지만, ‘곱하기 교회’에는 교회를 세우는 더 큰 기쁨이 있습니다. ‘키우는 기쁨’ 속에는 인간의 욕망이 끼어들지만, ‘세우는 기쁨’ 속에는 맑은 행복이 깃듭니다.
참된 교회는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 섬기는 교회입니다. 요나의 머리를 잠시 가려 줬던 ‘박넝쿨’을 키우는 교회가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나무의 진정한 열매는 ‘또 다른 나무’입니다!
사명은 생명을 소비하는 것
어느 교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풍선을 빵빵하게 불고 자기의 이름을 써서 천장으로 날려 보낸 후에 5분 동안 자기의 풍선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서로 밀치고 부딪치며 난리가 났는데 아무도 자기의 풍선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눈앞에 보이는 아무 풍선이나 잡아서 주인을 찾아주라고 했더니 모두가 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헤밍웨이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행복을 필사적으로 찾아다니지만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을 찾아주면 모두가 행복해집니다.
한 평범한 작가가 있었습니다. 몸이 너무 약해서 폐결핵과 척추질환 등 여러 질병을 앓다가 친구의 전도로 예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생계가 어려워 조그만 가게를 열었는데 장사가 너무 잘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옆 가게를 보니 파리만 날리고 조만간에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깊이 생각한 끝에, 오시는 손님들을 옆 가게로 보내드렸습니다. 돈은 전보다 덜 벌었지만 시간을 벌었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썼는데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빙점’이 탄생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미우라 아야꼬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명은 생명을 소비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하여!
오직 예수
우리나라는 물론 온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성공과 번영을 좇아가며 잃어버렸던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소망 그리고 교만과 탐욕과 거짓에 사로잡혀 잃어버렸던 겸손과 정결과 정직을 회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결산하실 때에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평가를 내리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를 전 재산으로 삼고, 예수 곁을 최고의 지위로 여기며, 예수의 칭찬을 최고의 명예로 알고, 예수가 인생의 전부인 사람이로구나.’ 오직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