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논단|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다툼의 무익성 _ 박형용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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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논단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다툼의 무익성

 

<박형용 박사 | 합신 명예교수, 신약학>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교회 안팎에서 다툼 없이 화목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책임을 감당하는 것”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다툼이 있는 세상으로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기사와 에덴동산의 묘사에서는 다툼이란 용어나 사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하고, 사람과 사람이 화목하며, 사람과 자연세계가 화목하는 아름다운 묘사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죄를 지은 후 모든 관계가 뒤틀리게 되었고 불목의 사상과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창세기 3장부터 “원수”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저주”와 “고통”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급기야 가인(Cain)과 아벨(Abel) 사이에 다툼이 있게 되고 살인이라는 끔찍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창 4:8). 창세기 3장 이후에 기록된 세상의 역사는 다툼의 역사라 해서 크게 잘못이 없는 줄 안다.

이와 같은 사건의 발전은 다툼이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죄의 결과로 온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다툼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고 말았다. 동아출판사(1997)에서 펴낸 동아 새 국어사전에 보면 “다투다”를 “옥신각신하다, 시비하다, 싸우다”로 정의해 놓았다. 우리는 현 세상에서 매일 매일 크고 작은 옥신각신, 시비, 싸움을 듣고 목격하고 또 싸움에 말려드는 경우도 있다. 비록 다툼이 무익한 것임을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의지도 능력도 없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의 죄로 왜곡된 세상을 바로 잡으시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을 입히셔서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롬 6:23)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의 열매들인 다툼을 없애기 위해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찬송하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평화를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모든 관계가 일그러진 이 세상에 화목을 이루시고 다툼을 제거하시고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타락된 이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설립하신다. 예수님이 설립하신 완성된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 안에는 없는 것도 많고 있는 것도 많다. 없는 것은 죄가 없고, 사망이 없고, 질병도 없고, 고통도 없고, 시기와 질투도 없고, 따라서 다툼도 없다. 그러나 있는 것은 영생이 있고, 사랑이 있고, 찬송이 있고, 화목이 있고, 배려가 있고, 평강이 있고 기쁨이 있다. 예수님은 이런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의 백성 성도들에게 주시기 위해 이 땅위에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의 첫 선포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마 4:17참조)였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하나님 나라”를 설립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사단과 귀신을 쫓아내시고 제어하심으로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사단의 자리가 없음을 분명히 하신다(마 12:28). 사단은 처음 창조 때에 아담과 하와를 꼬드겨서 죄를 짓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설립하신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사단의 역할은 먹히지 않고,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 극대화 된다. 사단은 처음 창조 때에 간교한 책동으로 죄를 세상에 들어오게 하였고 그 결과 사망과 고통과 질병과 다툼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사람을 괴롭히는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립하시고 확장하시고 왜곡된 세상의 질서를 회복하심으로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고통과 질병과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 시력 장애자, 어눌한 자, 날 때부터 일어설 수 없는 자, 여러 종류의 병자들을 완전하게 고쳐 주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바른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복음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고 따라서 그 나라의 특징을 유산으로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라고 다툼의 부정적인 면을 가르치는 반면,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고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삶의 긍정적인 면을 가르친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성령(the Holy Spirit)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표현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는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성령의 역할 없는 하나님의 나라는 존재할 수 없다. 바울이 성령의 열매로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아홉 가지를 말한 것(갈 5:22-23)도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삶이 어떤 모습일 것을 설명해 준다. 성령의 열매에는 정욕과 탐심과 시기와 질투와 욕심과 다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언급한 바로 다음에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라고 선언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5:22절부터 6:9절까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세 가지 관계를 사용하여 성령 안에서의 삶의 모습이 어떤 것임을 보여준다. 그 세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이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이 세 관계 중 어느 한 관계에는 연관되어 있다. 바울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갈 5:18)라고 명령한 다음 성령 충만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성령 충만한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삶(엡 5:24)을 살아야 하고, 성령 충만한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엡 5:25)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삶은 절대적인 순종과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성령 충만한 자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예수를 믿건, 믿지 않건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엡 6:2) 성령 충만한 부모들은 자녀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엡 6:4). 그리고 성령 충만한 종들은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 6:5)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며, 성령 충만한 상전들은 자신들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자신들도 종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늘에 계신 자신들의 상전이 자신들에게 어떻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 방법대로 이 세상의 종들에게도 똑 같이 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엡 6:9). 이와 같은 삶은 성령의 질서만 있을 뿐 다툼이 용납될 수 없는 삶이다.

예수님은 예수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 안에서 다툼과 시기와 질투 없이 살도록 우리를 선택하시고(엡 1:4),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요 1:12), 영생을 주시고(요 5:24),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큰 복을 주셨다(빌 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으면서도 아직도 우리들의 삶 속에서 시기와 질투와 다툼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한 방법이기 때문에 가장 지혜로운 하나님의 방법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하시고 영생을 소유하게 만드신 후 곧바로 성도들을 하나님 품으로 데려가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완벽하고 완전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재림 때에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 재림 때에 나타나기 전에는 육체를 입고 사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다툼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구원 받았지만 일정기간 동안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신다. 마태복음 28:18-20에 언급된 부활하신 예수님의 대전도 명령이나, 사도행전 1:8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질병과 고통과 시기와 질투와 다툼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세상을 향해 전파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고(고후 5:18),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고후 5:19)라고 선언하신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생명과 평안과 화목과 기쁨만 있는 완벽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실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그 완벽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교회 안팎에서 다툼 없이 화목하면서 사는 것이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책임을 감당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툼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으로 무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