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논단|
하인리히 불링거와 취리히 흑사병
<박상봉 교수 | 합신, 역사신학>
“나의 대적들은 기뻐했고, 신자들은 슬퍼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자신의 놀라운 은혜를 선물하셨다.”
14세기 흑사병은 유럽의 종교와 사회 전반의
개혁에 대한 요구를 가시화하는 역할을 했다
불링거는 믿음으로 고난을 감당하며 참된 위로는
그리스도 안의 영생에 있음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14세기 중엽에 유럽에서 전체 인구의 30%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흑사병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 후로 18세기 초까지 산발적으로 창궐하며 여전히 많은 생명을 빼앗아 갔다. 특별히,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도 흑사병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다시 맹위를 떨쳤다. 스위스 취리히도 외에는 아니었다. 종교개혁자 울드리히 쯔빙글리(Huldrych Zwingli)와 그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가 사역했을 때 흑사병은 여러 번 이 도시를 죽음의 색으로 물들였다. 1517년에 라인강 상류 도시 바젤에서 처음 발병된 흑사병은 1520년까지 스위스 모든 도시를 휩쓸었다. 취리히에서는 1519년 8월에 처음 발병하여 1520년 2월까지 지속 되었다. 당시 취리히 인구는 약 7,000명이었다. 몇몇 기록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확인했을 때, 이 시기에 유행했던 흑사병으로 2,1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스위스 도시들의 상황도 심각했다.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대표적으로 샹 갈렌(St. Gallen)에서 2,000명, 콘스탄츠(Konstanz)에서 4,000명, 바젤(Basel)에서 2,000명, 샤프하우젠(Schaffhausen)에서 3,000명이 죽음의 사신을 피하지 못했다.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이 가장 많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족 구성원 전체가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스위스 전역에서 애끊는 탄식과 통곡이 끊이지 않았다. 쯔빙글리도 1519년 9월 말에 흑사병에 걸려서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다. 다행히 의사의 치료를 통해서 11월 초에 가까스로 회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쯔빙글리는 회복 후에도 몸의 상태가 너무도 좋지 않았다. 몇 주 동안 설교 수행과 예배 참석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1519년 12월 말에 쯔빙글리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죽음을 극복하고 병상에서 일어난 쯔빙글리가 작곡한 ‘흑사병 노래’(Pestlied)는 많은 사람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취리히 교회에서 불링거가 사역하는 동안에 1535년, 1541년, 1549년, 1564-5년 그리고 1569년에 흑사병이 창궐했다. 1564-5년에 유행한 흑사병이 가장 참혹했다. 1519년 상황과 거의 유사하게 이때도 취리히 인구의 3분의 1이 이 ‘검은 죽음’(Schwarzer Tod)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링거와 그의 가족들이 흑사병에 감염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몇몇 동료들도 피할 수 없었다. 대표적으로 취리히 학교의 구약 교수였던 테오도르 비블리안더(Theodor Bibliander)가 죽음에 이르렀다. 불링거는 죽음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회복되었다. 1564년 취리히 흑사병의 공포를 자세히 기록했던 그의 일기장에서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서기 1564년 9월 15일 저녁.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나는 식사 후에 흑사병으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이 죽음의 병은 이미 취리히에 창궐했다. 나는 세 곳에 흑사병 종기들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하나는 왼쪽 허벅지 앞면 가장 근육이 많은 부위 중간에 생겼다. 무릎 아래 오른쪽 종아리에 있는 것은 바깥쪽 근육 위에서 곪았는데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나는 같은 오른쪽 허벅지 위쪽에도 동일한 종류의 종기를 가졌다. 이 종기들 때문에 나는 낮과 밤에 잠을 거의 이룰 수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통증을 머리와 옆구리 쪽에서 느꼈다. 의사들이 규칙적으로 나를 방문하여 치료했다. 요한네스 무랄토(Johannes Muralto)은 무릎 아래 있는 종기를 불로 태우는 소독을 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치료자이시다. 나는 9월 17일에 교회의 모든 사역자를 불러 모았다. 그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으며, 그들이 의연하고 충성스럽게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결속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교회에 대한 책임을 전달하였다. … … 나는 11월 16일에 간신히 병상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나는 12월 4일 거의 6주가 지난 후에 완치된 종기를 절개하였는데 … 특별히 나는 매우 긍휼함을 받은 것이다. 그때 많은 사람이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며, 다른 가족들처럼 교회에서 다시금 환송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나의 생명을 위해서 하나님께 솔직하게 기도했었다. 의사들과 다른 모든 동료도 나의 생명을 장담하지 못했으며 … 내가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나의 대적들은 기뻐했고, 신자들은 슬퍼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자신의 놀라운 은혜를 선물하셨다.”
종교개혁 당시에 흑사병 치료는 14세기 때부터 전수된 방식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흑사병에 걸렸을 때 치료약 같은 의료적 조치를 통해서 낫는 것은 거의 기적과 같았다. 이 전염병에 걸리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었지만, 그러나 당시 수준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다. 1348년에 프랑스 왕 필립 6세(Philipp VI.)가 흑사병의 원인 규명을 의뢰한 것과 관련하여 파리 대학교 의학부는 흑사병이 공기를 통해서 ‘전염’(Kontagion)이 된다는 연구결과를 제시했다. 이때로부터 가장 유행했던 흑사병의 예방법 중에 한 가지는 집 안을 불로 뜨겁게 하거나 향료를 불로 태워 공기를 정화하는 것이었다. 공기 중에 있는 흑사병의 원인을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고 있었던 교황 크레멘스 6세(Klemens VI.)는 흑사병 예방을 위해서 자신의 집무실에 큰 불을 피우고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예방법은 흑사병균(Pestbazillius)를 가진 쥐들과 그 쥐들에 기생하는 벼룩들을 차단할 수 있는 보건위생과 해충구제가 동반되지 않는 현실에서 직접적인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흑사병이 걸린 사람의 타액으로 2차 감염이 이루어진다는 의학적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이 병의 전염을 미리 예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16세기 상황도 이 수준에서 크게 진전된 것이 없었다. 그래서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지만 이미 흑사병에 걸린 후에 의료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최선의 조치였다. 14세기 이래로 중요한 치료법은 흑사병의 종기를 사혈 하는 것, 음식을 조절하는 식이요법, 오랜 전통요법인 약초로 만든 생약 등이 있었다. 이미 일기장 기록을 통해 확인된 것처럼, 불링거는 종교개혁 당시에 가장 많이 활용되었던 흑사병의 종기를 사혈 하는 치료를 여러 의사로부터 받았다. 당연히, 열이나 통증을 완화 시켜주는 약초들로 만든 생약을 먹는 것도 함께 처방되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불링거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은혜를 누리지 못했다. 취리히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흑사병은 그의 가족들에게 큰 비극을 안겨 주었다. 1564-5년은 불링거의 생애에서 가장 슬픈 해였다. 1564년 말에 그의 아내 안나뿐만 아니라 둘째 딸 마가레타와 그녀의 태어난지 4일 된 아들 베른하르트가 이 죽음의 사신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565년 초에 흑사병은 큰 딸(안나)과 세째 딸(엘리자베스)을 가족과 영원히 이별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불링거는 1564년 9-10월에 발병된 흑사병으로 아내, 둘째 딸 그리고 손자의 죽음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이때의 슬픔도 그의 일기장에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음날 밤에 흑사병은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내인 안나 아들리슈빌러를 불러갔다. 그녀가 9일 동안 병으로 누워 있었을 때 깊은 신뢰로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그러나 9일째 되던 날 병상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일은 (1564년) 9월 25일 월요일 정오에 발생했다. 그녀는 다음 날(26일) 낮 12시에 모든 도시로부터 온 많은 일반 사람들과 명망이 있고 존경을 받는 인사들의 화려한 환송 가운데서 엄숙하게 묘지에 안장되었다. … 10월 27일 새벽 4시에 흑사병은 나의 사랑하는 딸 마가레타 라바터(Margareta Lavater)를 엄습했다. 그녀는 다음날인 10월 28일에 아들 베른하르트(Bernhard)을 출산했는데, 그는 겨우 이틀이 지난 10월 30일에 유아 세례를 받았다. … 그 아이는 다음 날 밤에 죽었고, 그의 엄마는 이미 10월 30일 밤 11시경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31일 오후 4시에 흙 속에 묻혔다. 많은 사람이 교회 입구에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환송했다. 그녀는 칼스투엄(Karlsturm) 묘지에 안장되었다.”
불링거보다도 오래 생존한 자녀들은 11명 중에 겨우 4명이었다. 이 비극적인 가족사는 그에게 큰 아픔과 상실감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링거는 가족에 대한 아픔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묵묵히 견뎌냈다. 그가 목회자와 위로자로서 모든 사람에게 칭송이 된 것은 이런 가족사와 무관하지 않다. 불링거는 다양한 경험들로부터 고난에 처한 성도들을 위해서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도 흑사병과 관련된 사회적, 의학적 그리고 신학적 연계에 관한 지식은 당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시기에 흑사병의 효과적인 예방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사회적 격리를 실천하는 것은 매우 낯설 수밖에 없었다. 오직 흑사병에 걸렸다는 혐의가 확실시되었을 때, 그 사람은 정부의 방역 조치에 따라서 어떤 특정한 장소에 기본적 치료도 없이 격리되었을 뿐이다. 새로운 인식전환 없이 집에서 가족들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일터, 학교, 정부청사, 교회 등의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직접적 접촉을 통해서 이 전염병이 급속하게 확산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일상적인 생활은 전혀 기대될 수 없었다. 하지만 사회적 삶의 붕괴 속에서도 위기극복에 대한 희망을 신앙에서 찾는 것은 결코 포기되지 않았다. 당연히, 이 심각한 시기 속에서도 사람들은 교회를 찾았고 예배는 지속되었다.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취리히도 다르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이 현상은 이미 14세기에 창궐했던 흑사병에 대한 교회의 인식과 깊이 맞물려 있다. 541 – 767년에 지중해 연약 국가들에서 유행했던 흑사병은 500년 넘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사건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1346-53년에 죽음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이 짧은 기간 동안 흑사병이 온 유럽으로 전파되며 다시 대유행(Pandemic)을 한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흑사병은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와 상선(商船)을 통해서 유럽에 유입된 것을 알려져 있다. 이때 75,000,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당시 유럽의 불결했던 생활환경, 전염방식의 불충분한 지식 그리고 부족한 영양 상태는 이 전염병이 급속도로 퍼질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각 지역에서 창궐한 흑사병은 아무런 예방책이 없는 현실 속에서 다른 지역으로 피난한 사람들, 의사의 치료를 통해서 회복된 일부 사람들 그리고 자가면역(自家免疫)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고 죽을 사람들이 다 죽었을 때 그 위세가 사그라졌다. 하지만 유대인이 거주하는 지역은 흑사병이 거의 퍼지지 않았다. 구약 성경의 율법에 근거한 정결 의식을 통해서 위생에 신경 썼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만약 어떤 사람에게 발병이 되면 확실한 격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유럽 사람들에게 매우 어리석게도 흑사병을 이겨낼 수 있는 대안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강렬한 반(反)유대주의 정서를 만들어 냈을 뿐이다. 많은 사람의 인종적 독기(毒氣)에 의해서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가상의 죄목으로 수천 명의 무고한 유대인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음의 그림자가 깊이 드리운 시기에 사람들은 한편으로 흑사병을 하나님의 징계(Gottesstrafe)로 생각했다. 오직 신앙을 통해서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나서 삶의 안정과 평안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흑사병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죄를 자복하는 중보미사(Bittgottesdienst), 행렬(Prozession), 수호성인들에 대한 숭배 등이 새로운 신앙 운동으로 사람들의 일상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죽음 이후의 구원을 위해서 현재의 쾌락을 멀리하는 금욕과 고행이 강요되었다. 중세 후기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목회적 방관 속에서 위생적이고 의료적인 권면과 예방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양심과 의식을 완전히 사로잡는 미신적 종교심을 자극하여 흑사병을 이겨낼 수 있다고 선동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흑사병의 위협 속에서 어떤 소망도 없이 삶을 즐기는 것에만 온 힘을 쏟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아무런 해결책이 없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오직 ‘현재를 즐기자’(Carpe Diem)는 체념적 쾌락주의가 많은 사람을 지배한 것이다. 예상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으며 그리고 치료할 수 없는 죽음의 병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말고, 오히려 지금 주어져 있는 시간을 최대한 즐기자는 심리였다. 이 쾌락주의자들은 가족, 이웃 그리고 삶의 터전을 내팽개치고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14세기 흑사병은 종교적인 왜곡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의 사회적인 체계에도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유럽의 종교와 사회 전반의 개혁에 대한 요구를 가시화시키는 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흑사병으로 종교와 사회의 체계가 무너진 유럽의 무덤에서 피어났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흑사병을 하나님의 징계로 간주 되었던 인식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한 실례로, 1564년 10월 27일에 흑사병으로 죽은 불링거의 둘째 딸인 마가레타의 남편 루드비히 라바터(Ludwig Lavater)가 1564년 8월에 출판했던 『흑사병에 관하여』(Von der Pestilentz)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교회에서 선포했던 흑사병과 관련된 두 편의 설교가 담긴 것이다. 라바터는 당시 유행했던 천문학의 관심 속에서 흑사병의 예방을 위한 위생적이고 의료적인 조치에 대해서는 거리를 둔 채, 이 전염병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징계임을 밝혔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 속에서 가장 먼저 영원 구원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다음으로 육체적 건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불신앙, 죄 그리고 신성모독이라고 밝히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회개를 외쳤다. 만약 흑사병이 걸렸을 때는 하나님이 선한 것으로 주신 약을 먹어야 되지만,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다음과 같은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면, 약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약을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 당시 위생적이고 의료적인 대안이 없었던 현실 속에서 무서운 전염병으로 떨고 있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긍휼 외에 다른 소망이 없다고 믿었다. 흑사병을 수단으로 사용하여 세상을 징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치료의 은혜와 천상의 위로를 얻기 위해 교회는 예배를 중단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신학적으로 문제를 가졌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500년 전에 살았던 인물들로서 오늘의 기준 속에서 아직도 갈 길이 멀었던 위생 개념과 의료 발전의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을 뿐이다.
만약 종교개혁자들이 오늘날과 같은 위생적이고 의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유럽에서 흑사병은 1720년 5월부터 1721년 9월까지 프랑스 항구 도시인 마르세유에서 마지막으로 창궐했다. 물론, 이 시기에도 흑사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있는 의학적 원인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도시를 봉쇄하고, 시체를 매장할 때 석회를 뿌리며 그리고 교회 같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들을 폐쇄하는 방식을 통해서 이 전염병이 더 많은 사람과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1894년에 알렉산더 예니신(Alexander Yenisin)에 의해서 흑사병균이 최초로 발견되었다. 이 전염병의 원인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1897년에 파울 루이스 시몬드(Paul-Luis Simond)가 흑사병의 확산 때 쥐에서 기생하는 벼룩이 큰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보건위생과 해충구제를 통해서 이 전염병을 확실하게 막을 수 있는 예방법을 찾게 된 것이다. 이 결과로 흑사병은 유럽뿐만 아니라 다른 대륙에서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만약 종교개혁자들이 이러한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면, 그들도 생명을 살리는 것이 우선적으로 강조된 안식일 정신과 관련하여 모든 사람의 생명과 관계된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주일 예배의 일시적 중단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주일에 모든 신자가 함께 모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 대신에 각 신자가 흩어져서 가정에서 드린다고 해도,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했던 교회론의 입장에서 교회와 예배의 본질을 훼손하거나 변질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불링거도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16세기 취리히에서 살았던 불링거도,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아들이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고, 심방을 통해서 환자를 격려하며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천국의 소망을 더욱 온전히 붙들게 하는 목회적 직무 외에 흑사병을 이겨낼 수 있는 위생과 의학 지식 같은 다른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불링거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력하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인간적 삶의 종말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이 문제는 중세 후기부터 유럽 전역에서 창궐했던 흑사병 때문에 삶의 위협을 받고 있는 신자들에게 반드시 답변되어야 할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불링거가 취리히 교회의 대표 목사로 활동했던 초기인 1535년 8월부터 12월까지 그 도시에서 흑사병이 발병했다. 그의 가족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불링거는 1535년 8월 31일에 바젤의 종교개혁자인 오스발트 미코니우스(Oswalt Myconius)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님이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시다”(qui vitae et mortis dominus est)는 고백과 함께 죽음의 공포에서 떨고 있는 신자들로부터 이 고통의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소망한다는 것을 나타냈다. 이 일을 겪으면서 불링거는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신자들을 너무도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고 이 전염병의 위협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신자들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취리히 교회의 대표 목사는 신속하게 흑사병과 같은 질병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신자들을 위해서 죽음에 대한 신학적 답변서를 저술했다. 1535년 10월 중에 출판된 『병자들의 보고서』 인데, 종교개혁 시대에 목회적 관점에서 질병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개신교 영역에서 최초로 설명한 것이다. 불링거는 이 목회 저술을 통해서 신자들이 질병, 고통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신앙적으로 대처해야 하는가를 하나님의 섭리적 입장에서 자세히 밝혔다. 핵심적으로, 부활과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복된 죽음이다. 신자는 지금 천상에 이르는 영혼의 구원과 함께 마지막 심판 때 새로운 육체로 부활하여 영원한 삶을 살기 때문에 어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 안에 허락된 시험으로서 질병, 고통 그리고 죽음은 저주가 아니다. 신자의 죽음은 모든 비참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참된 위로를 얻기 위한 과정이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영광에 이르는 길이다. 불링거는 죽음이 인간적인 아픔과 슬픔을 피할 수 없게 하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되고 영원한 삶을 누리게 하는 ‘영적 처방’(geistliche Artznei)으로서 결코 낙심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고 위로했다. 물론, 불링거는 천상의 소망 중에 있는 죽음을 말하면서도, 흑사병 같은 죽음의 질병에 걸린 환자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의지하며 의사의 상담과 치료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의무임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같다고 밝혔다. 흑사병 같은 질병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를 기대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링거는 당시 시대 속에서 시도할 수 있는 최상의 방식으로 아직 살아있는 병자에게 가족의 돌봄과 의료적 치료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각인시켰다. 사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흑사병 같은 무서운 질병 앞에서 인간은 너무도 연약하고 무력했다. 이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을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효과적인 치료 약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신앙적으로 슬픔을 위로하는 것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상의 소망을 붙들며 죽음을 이겨내도록 권면하는 것 외에 다른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없었다.
1564-5년에 흑사병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잃었을 때, 불링거는 이미 『병자들의 보고서』에서 밝힌 대로 모든 인간적인 슬픔과 고통을 가슴에 묻고 신앙적으로 반응을 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 속에서 삶의 고난을 묵묵히 감당하며 천상의 소망을 더욱 힘있게 붙들었다. 참된 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에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신자들 앞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목자로서 위로적 모범을 실천한 것이다. 그 당시에 흑사병으로 가족을 잃은 신자들은 불링거의 신앙적 자세를 보면서 위로를 얻고 인내할 수 있었다. 취리히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비겨간 사람들은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자의 몫을 다시금 감당했다. 삶은 분주해졌고, 교회는 신자들로 가득 찼으며 그리고 일터는 일상의 풍경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