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설교
가시 덕분에
고린도후서 12:1~10
<조봉희 목사 _ 지구촌교회>
고난이라는 가시 덕분에 교만하지 않게 되고, 겸손하게 되니 은혜
가시 덕분에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며 기도한다면 그것은 변장된 축복이요 은혜
나를 아프고 힘들게 하는 가시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게 함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의 대표작 〈어린왕자〉에서 이런 얘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비행기의 엔진고장으로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는 엔진수리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때 아주 작은 별나라에서 어린양을 구하러 내려온 어린왕자는 조종사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어린양들이 가시가 돋친 꽃들도 먹을까요?’ 조종사는 비행기 수리에 바빠 건성으로 대답합니다. ‘아마도 양은 닥치는 대로 먹을 거야.’ 어린왕자는 좀 더 진지하게 묻습니다. ‘날카롭게 찌르는 가시가 있는데도 그 꽃을 먹을까요?’
그러면서 또 하나의 진지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나무에 가시는 왜 생겼을까요? 가시는 왜 필요할까요? 가시는 어디에 쓸모가 있는 것일까요?’ 조종사는 여전히 비행기 수리에 바빠 건성으로 대답합니다. ‘그냥 생긴 것일 거야. 가시는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거야.’라고 성의 없이 대답합니다. 고개를 갸우뚱이던 어린왕자는 잠시 후 스스로 놀라운 답을 얻습니다. 그는 가시의 필요성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아니에요. 꽃은 너무나 약하고 연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려고 가시가 돋아난 거예요.」 꽃들은 약한 존재이기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시가 필요한 것이라는 역설적 담론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시 덕분에 꽃들은 안전한 것입니다. 가시가 있는 식물일수록 좋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시 덕분에 좋은 성분과 약효를 만들어냅니다. 장미꽃은 가시 속에서도 아름다운 색상과 향기를 발휘합니다. 가시로 뒤덮인 선인장은 여러 분야에 약용으로 쓰입니다. 가시오가피는 만병통치약으로 활용됩니다. 그 외에도 구기자나무, 가시 복분자는 강장제 약효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두리안이라는 열대과일은 영양분이 굉장한 고급열매입니다.
소위 과일의 왕이라고 불리는 두리안은 말레이어로 ‘가시’(duri)라는 뜻입니다. 원래는 너무나 향기로운 맛을 내는 과일이어서 신들이 먹는 과일이었는데, 인간들이 몰래 훔쳐 먹는 것을 방지하려고, 겉에다가 큰 가시를 씌웠다고 합니다. 이처럼 가시 덕분에 사람들이 두리안을 쉽게 딸 수 없어서 열매가 충분히 익은 다음에 저절로 떨어져서 맛이 좋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가시 덕분에 ‘외강내유’를 이루는 것입니다.
일본 재계의 우상적 인물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빈민가 출신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난 ‘때문에’ 라고 탓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난 『덕분에』 자수성가하여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라고 운명론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배우지 못한 『덕분에』 평생 남들보다 한 자라도 더 배우려고 학습에 온 열정을 쏟았습니다. 거기다가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몸도 약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몸이 약하기 ‘때문에’라고 핑계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몸이 약했던 『덕분에』 더 조심하고 삼가 하면서 건강을 챙겨 95세가 넘도록 장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 무학, 연약함이라는 가시 덕분에 열정인생을 산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희망전도사 역할을 하고 계시는 김형석 선생님과 유사합니다. 가난 덕분입니다. 약함 덕분입니다. 스펙이 부족한 덕분입니다. 한 마디로 가시 덕분입니다.
때때로 가시는 우리를 아프게도 하지만, 우리를 더욱 안전하고 유익되게 해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시 때문에」라기보다 『가시 덕분에』라는 긍정의 철학을 역설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인생의 가시 덕분에 잘못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외과 의사들이 아이들을 수술하기 전에 이렇게 달래준다고 합니다. “내가 너를 아프게 할지는 몰라도, 너에게 손해를 입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시련이 약간 고통스러울 수는 있어도, 하나님께서 손해를 입히시지는 않으심을 믿으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힘든 현실을 ‘때문에’라며 부정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덕분에』라고 말하는 〈긍정의 철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일수록 ‘때문에’라고 핑계를 일삼습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사람일수록 『덕분에』라는 신앙적 역설로 운명을 바꿉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대부분 인과응보의 고난이 아닌, 섭리적 고난입니다. 영어로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God’s purpose behind your pain. 당신의 고통 뒤에는 하나님의 복된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누구나 다 여러 가지 사연을 안고 살아갑니다. 무언가 부족함 있고, 연약함이 있어야, 그 덕분에 인격이 다듬어지고, 신앙이 고결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진솔한 간증입니다. 그는 외형적으로는 완전무결한 스펙을 가진 자였으나, 역시 그에게도 치명적인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약함의 미학을 역설적으로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약함의 찬가입니다. 본문 7절부터 10절을 메시지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받은 계시들이 엄청나고 또 내가 우쭐거려서는 안 되겠기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장애를 선물로 주셔서, 늘 나의 한계들을 절감하도록 하셨습니다. ~~ 그래서 내가 교만하게 다닐 위험이 없게 한 것입니다. ~~ 주님은 세 번이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네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 전부다. 내 능력은 네 약함 속에서 진가를 드러낸다. ~~ 그리하며 나는 약하면 약할수록 점점 더 강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가시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가시 덕분에 과연 어떤 유익을 얻게 될까요?
- 가시 덕분에 겸손해지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2%부족 덕분에 교만하지 않게 됩니다. 겸허한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진솔한 자기고백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은 매우 대칭적인 구조로 전개됩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사도 바울을 높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바울로 하여금 천국의 신비함을 보는 최고의 영광을 체험시켜 줍니다. 그런데 7절부터는 사도 바울을 낮추시는 역설적인 은혜를 강조합니다. 그는 실력이 탁월한 선교사로 세계역사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동양에서 서양을 뛰어넘게 하였습니다. 개인적 차원에서도 엄청난 영적 세계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무나 큰 인물이 된 바울로 하여금 우쭐대거나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치명적인 고난의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만하지 않게 하시는 고난이라는 수단의 은혜를 이렇게 해석해봅니다. 첫째, 교만을 꺾으려고 고난을 주십니다. 둘째, 교만을 막으려고 고난을 주십니다.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만해 질 수 있어서 하나님은 시련과 고난이라는 매체로 교만을 꺾으시든지, 막아주십니다. 바울의 진솔한 간증입니다.(7절)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한 학생이 C. S. 루이스 교수에게 이런 심오한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정말 하나님이 사랑의 신이라면 인간에게 대답할 수 없는 고통이 발생할 수 있을까요?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풀리지 않는 고통을 허락하시는 걸까요?’ 그 질문에 C. S. 루이스는 크리스천 지성인답게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인간이란 참 교만한 존재야. 만일 고통이라는 문제가 없다면, 인간은 얼마나 더 교만해졌을까?” 이 대답과 함께 그가 쓰게 된 책이 그의 역작 〈고통의 문제〉입니다. 여하튼 우리는 고난이라는 가시 덕분에 교만하지 않게 되고, 겸손하게 되니 은혜입니다.
- 가시 덕분에 기도하는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의 가시 때문에 세 번씩이나 작정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필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을 안수하여 고쳐주었습니다. 그가 손을 대기만 하면 불치병도 고침 받는 기적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너무나 심각한 질병으로 시달렸습니다. 참기 어려운 고통을 시달렸습니다. 이런 인생의 가시 덕분에 그는 하나님 앞에 더욱 엎드려 기도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육체의 고통이라는 가시 덕분에 교만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겸손히 하나님만 더욱 의지하며 살았기에 그는 인생의 가시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고 예찬합니다. 하나님께서 큰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허락한 가시이기에, 『내 은혜』라고 천명하십니다.(9절)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그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을 살펴보면 아름다운 영성으로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 없이 빳빳하게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조용히 무릎 꿇고 엎드려 기도해온 사람입니다. 이처럼 당신의 약함 덕분에 기도하게 된다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인생의 불가항력적 가시 덕분에 두 손 들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찬송가 가사처럼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는 순진한 신앙으로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만일 우리가 인생의 가시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지하게 된다면 그 가시가 고통스럽더라도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일 수 있습니다.
요즘 어떤 일로 주님 앞에 나와 엎드려 기도하십니까?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보고 계십니까? 남들에게 없는 인생의 가시 덕분에 당신이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며 엎드려 기도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변장된 축복입니다. 그 가시 덕분에 하나님만 더욱 의지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가시 덕분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가시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힘든 삶을 살기도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갑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진솔한 간증입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 곧 인생의 가시 덕분에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표명합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가진 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약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역력하게 드러납니다. 약할수록 은혜가 크게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강함으로, 악재를 호재로 사용하십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혁명분자들의 총에 즉사하시는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아 맞아 간질병까지 생겼습니다. 이런 후유증으로 일평생 고통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아픔과 약점을 「거룩한 병」이라고 간증합니다. 자신의 불행과 아픔 덕분에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는 문학작품들을 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 선교사 H. Taylor는 “하나님의 모든 거인들은 약한 사람들이었다.”라고 정의해줍니다. 하나님은 비범하고 탁월한 영웅호걸을 사용하는 대신에, 평범하고 초라한 약자들을 크고 위대하게 쓰십니다. 하나님은 약한 사람들을 사용하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9절에서 약함의 축복을 이렇게 예찬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약한 것을 더욱 기쁜 마음으로 자랑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 머물러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 머문다는 단어는 굉장한 표현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머무를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히브리어로 ‘쉐키나’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정착입니다. 내가 약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내 위에 고정하여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주둔하는 것입니다. 내가 연약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계속 머물러주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역설적 간증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승리의 선언입니다. 10절입니다. 『나는 약하면 약할수록, 점점 더 강하게 됩니다.』 (And so the weaker I get, the stronger I become) 그렇습니다. 오늘 내가 약한 만큼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 주고, 주둔해 줍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러 종류의 가시가 있을 것입니다. 질병의 가시, 자녀문제의 가시, 인간관계 상처의 가시, 경제적 어려움의 가시, 가족 중에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영적 가시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가시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계십니까? 최근에 어떤 종류의 가시가 당신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까? 부부관계의 가시로 아파하고 계신가요?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여 남들이 모르는 고통 중에 계신가요?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고린도후서의 일관된 주제는 위로입니다. 오늘도 바울은 우리 인생이 겪는 고난의 본연에 관하여 신학적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그림, 즉 복된 섭리에 따라 위로받으며 살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가시 덕분에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불가항력적 가시 덕분에 두 손 들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신을 아프고 힘들게 하는 가시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게 합니다.
그래서 라틴어 속담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
오늘의 결론은 한 마디입니다. 『나는 약하면 약할수록, 점점 더 강하게 됩니다.』 (And so the weaker I get, the stronger I become).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총입니다. 십자가라는 고난의 가시를 통해서 부활의 능력으로 더욱 멋진 승리자가 되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