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종교개혁500주년 특강 2| 개혁파 교회에 대한 츠빙글리의 기여 _ 이승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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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 종교개혁 500주년 특강 _ 2

 

* 지면 편집상 필자의 허락을 받아 축약하고 각주를 생략한다. 원본을 읽거나 내용 인용을 원하는 독자는 근간 도서 <한 권으로 읽는 츠빙글리의 신학>을 참고하기 바란다. – 편집자 주

 

개혁파 교회에 대한 츠빙글리의 기여

 

<이승구 교수 _ 합신, 조직신학>

 

종교 개혁은 항상 성경에 의한 개혁이면서 교회의 초기 모습에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개혁파 교회는 말씀 중심으로, 말씀을 같이 해석하며 구체적으로 적용해 가는 해석 공동체이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에 근거한 교회의 모습을 위해 바로 실천 하려는 민중이 중요하다

우리는 츠빙글리가 말한 참된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거짓 종교를 드러내는가?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리히를 비롯하여 루체른(Oswald Myconius), 바젤(Myconius, Johannes Oecolampadius) 등 각 도시들이 이룬 종교 개혁의 성과는 놀랍다. 후에는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스위스 연방들(the Swiss Confederation)이 함께 스위스의 종교 개혁을 하게 되었고, 이들은 결국 유럽의 개혁파 교회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 일의 앞 자리에 서 있는 츠빙글리의 개혁파 교회에 대한 기여는 무엇일까?

 

  1. 자국어로 하는 예배 시도와 그 정착

중세 유럽 교회들은 어디서나 라틴어로만 예배를 하였고,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1세기 신약 교회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속에 근거하여 그에 감사하면서 구약 교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을 예배했다. 복음을 전한 다른 지역에서도 그 지역의 언어로 예배하거나 적어도 그들이 공유하는 통상어였던 코이네 희랍어로 예배하였다. 그러다가 아마 350년경부터는 서방 교회에서 라틴어 예배가 보편화되고 전통이 되어 자국어 예배가 사라져 버렸다. 주일 저녁 예배에 한 순서로만 자국어로 설교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취리히 시의 시민 사제로 섬긴 츠빙글리는 이 가끔 있던 일을 보편화하여 모든 예배를 당시 취리히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스위스 투의 중세 독일어로 인도하고 모든 신도들이 잘 이해하는 예배에 참여케 하였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1525년에 취리히 시가 츠빙글리의 지도 아래서 천주교 미사를 새로운 형태의 예배 형식으로 대체하면서 이 일이 보편화된다. 물론 후에 종교 개혁이 된 곳마다 다 자국어로 예배를 드리게 된다. 성경도 자국어로 번역하여 읽고, 예배도 자국어로 하여 자신들이 무엇을 믿는지를 알며, 자신들이 예배의식에서 무엇을 하는지를 알고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개혁자들을 따르는 사람들, 특히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었다. 자국어 성경을 가지게 된 것에 못지않게 자국어로 하는 예배의 참석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사실 츠빙글리가 이 일을 시작할 때 당시 취리히 사람들은 자국어로 된 성경이 없었다. 후에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을 때 개혁파 성도들이 열심히 그것을 읽고 그 뜻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결과를 내었다.

이 첫째 기여는 사실 처음 신약 교회 때의 예배에로 돌아간 것이다. 종교 개혁은 항상 성경에 의한 개혁이면서 교회의 초기 모습에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의미이다.

 

  1. 연속적 성경 읽기와 강해(lectio continua)의 회복

츠빙글리의 기여로 교회 안에서 성경을 연속적으로 읽고 강해하던 그 처음 모습을 회복했다. 이 일은 1세기 신약 교회가 매주 토라와 선지서의 상당 부분을 연속해서 읽던 회당 예배의 전통을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개혁하면서 구약과 함께 사도들의 글들을 읽어 가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구약과 신약으로 정착된 성경을 강해하는 것이 예배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 오리겐(185-254)의 연속 강해 설교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2세기 후반부터 3세기에도 연속 강해 설교가 예배 중에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요한 크리소스톰(347-407)과 어거스틴(354-430)도 성경 연속 강해를 했으므로 4세기와 5세기에도 예배 중 성경을 연속해서 강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다고들 생각한다.

로마 교회에서 선택적 성구 목록(lectionary)이 시작된 것은 3세기 때부터라고 여겨지고, 어거스틴 때에는 제한된 날을 중심으로 사용되다가, 5세기 레오 대제(440-461년 재위)와 그레고리 대제(540-604, 590부터 재위) 때에 아주 본격적으로 소위 선택적인 읽기(lectio selecta)가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츠빙글리가 1519년 1월 첫째 주부터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마태복음 강해 설교를 시작한 것은 중세의 관례를 의도적으로 극복하며 획기적인 시도를 한 것이다. 이 때 그는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이 성경을 한 절씩 강해 설교한 것을 의식하며 의도적으로 그 전통에로 돌아가고자 했다고 한다. 그는 마태복음 연속 강해 설교 후, 여러 성경들을 연속 강해했다.

이러한 “연속적 성경 읽기와 강해”(lectio continua) 식의 예배는 또한 중세의 교회력을 중심으로 한 예배를 개혁한 것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성경이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으므로 교회력을 따라서라도 신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그 의미를 생각하고 그 것을 추체험하면서 그 의미에 동참하도록 하려던 것은 고육지책이었지만 결국 성경을 가르치지 않은 것을 보충하려는 시도였다면, 성경을 차례를 강해해 가면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 사역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가르쳐 나가며 그 의미에 동참하게 하는 일은 개혁파 교회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본래 처음 교회가 하던 일에로 돌아간 것이라는 점에 종교개혁(re-formation)의 한 의미가 있다. 처음부터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차례로 공부해 나가는 공동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개혁파 교회는 말씀 중심의 교회를 이루었다. 이런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해석하며 구체적으로 적용해 가는 해석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1. 바른 종교와 거짓된 종교를 구별하여 제시하는 일의 공헌

츠빙글리는 그 제목으로 유명해진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를 구별하여 제시하는 일의 선구자였다. 중세 말에 “종교”라는 말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듯 세상의 여러 종교를 생각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 경건, 그 생각들과 활동들을 지칭한다. 그들에게 종교는 “기독교 종교”(Christian religion)뿐이었다. 그 중에도 참된 것이 있고, 거짓된 것이 있다는 것을 츠빙글리가 앞장서 드러낸 것이다.

요약하자면, 참된 종교는 말씀에 일치하는 대로 하고, 거짓된 종교는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을 많이 허용하는 것이다. 츠빙글리는 이렇게 말한다: “신실함은 무엇보다 먼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를 섬길까를 하나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요구한다. 그 다음에 그 배운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더하지 않고, 제거하지 아니할 것을 요구한다… 참된 종교, 또는 경건은 한 분이고 유일하신 이 하나님을 붙잡는(cling to)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공부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믿음의 내용과 예배와 교회의 제도, 사회와 국가의 삶을 사는 것을 강조하면 최소한이나마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츠빙글리가 말하는 “참된 종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경에 관련한다고 하면서도 성경에 다른 것을 더 하거나 그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지 않으려는 것은 거짓 종교라는 말이다. 1522년에 사순절 동안 어떤 음식을 먹고 먹지 못하느냐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대해 츠빙글리는 성경이 금한 것에는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지만 성경이 금하지 않은 것에는 자유롭다고 했다. 이는 온전한 의미의 기독자의 자유에 대한 입장을 잘 드러낸 논의요 활동이었다.

 

  1. 예배당 안의 상들을 제거한 취리히 교회 공동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십자가와 예수의 상(像) 등 수많은 상(像)들이 예배당 안팎에 있음을 보고서, 그것이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그 앞에 절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조항을 위반한 것임을 제시하는 츠빙글리 설교를 듣고서 성도들과 온 도시 전체가 잘못이 있음을 깨닫고 고쳤다. 이는 말씀에 의해 교회 공동체가 개혁된 매우 가시적인 예다. 여기 중요한 세 부류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여 가르치는 목회자이다. 그가 십계명에 있는 상(像) 금지 조항을 당시의 교회와 관련하여 가르치지 않았으면 사람들은 천년 이상의 관습 속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 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에 근거한 교회의 모습이 있도록 하려고 한 민중이 있다. 이들이 없었으면 설교자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였을 것이다. 말씀을 듣고 바로 실천 하려는 민중이 중요한 것이다. 말씀은 말씀이고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획시기적(ephocal) 역사를 이루지 못한다. 셋째는 이것이 폭도들에 의한 파괴처럼 보이지 않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되도록 질서를 집아 취리히 전체의 예배당에서 체계적으로 상을 제거하도록 한 제네바 시의 경건한 정치 지도자들이 있었다. 취리히 시의 사건이 후에 뮌스터에서의 재세례파에 의한 소요처럼 기억되지 않고, 취리히 전체의 종교 개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이런 경건한 정치 지도자들 덕분이다. 이 세 부류가 각기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때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이 땅에 드러낼 수 있었다.

 

  1. 츠빙글리에게서 아쉬운 점

제일 안타까운 것이 그의 성찬관이다. 물론 오랫동안 널리 오해된 것과는 달리 츠빙글리의 이해에도 칼빈 등이 후에 논의하는 영적 임재설에 해당하는 내용이 암묵리에 들어 있다는 것이 이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고, 츠빙글리의 표현 방식은 그의 후계자요 동료인 불링거의 표현보다는 좀 오해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마르부르크 회담(the Marburg Colloquy, 1529년 10월 1일-4일)이 별로 좋은 결론 없이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불링거와 칼빈이나 베자가 동의한 그런 성찬관이 좀 더 일찍 잘 표현되고 그것이 잘 논의될 수 있었으면 종교 개혁 교회 전체가 하나로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잘 발견하고 논의한 바와 같이 츠빙글리의 의도도 결국 일종의 영적 임재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그가 이를 모호하게 표현한 것은 사실이기에 안타깝다. 불분명하고 오해를 야기하는 표현들과 루터의 너무 강한 공재성적 표현들이 결국 종교개혁의 교회들을 나누고 만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츠빙글리가 예배에서 회중 찬송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음악을 잘 알고 악기를 다룰 줄 알았기에 아마 그 역기능을 생각해서 예배 중에 사용하지 않으려 한 것 같다. 그는 예배 중 악기 사용을 하나님이 불허하셨다는 근거에서 금했다. 또한 주로 사제들이 노래하는(Priestly chanting) 것과 수사들의 성가대(monastic choirs)를 비판한 것이다. 이런 것들이 성도들의 관심을 참된 영적인 예배로부터 분산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동기에서 그것을 대신할 회중 찬송을 잘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므로 초기 종교 개혁기의 취리히의 예배는 우리에게 익숙한 회중 찬송이 있는 예배와는 다른, 아직 절충기의 예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로, 당시 거의 모든 개혁자들과 같이 그도 당대 상황에 너무 충실하여 교회와 국가를 거의 동일시했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복음이 선포되면, 통치자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신실하고 좋은 시민이고, 기독교 도시는 바로 기독교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대에는 국민 거의가 교회의 회원이기도 해서 그런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 표현하기는 어려웠을 터이다. 이런 점에서 츠빙글리 등의 개혁자들이 당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바를 곧바로 우리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아주 왜곡된 결과를 낼 수 있다. 그 때와 우리 시대는 처한 정황과 목회적 상황이 아주 다르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외적으로는 기독교인이라고 하고 주일에는 예배에 참여하는 기독교권(Christendom)에서 생각하며 표현한 것이고, 우리는 세속 국가 속에서 생각하고 표현해야 한다.

넷째로, 아직도 사제라는 용어를 유지한 문제이다. 1525년에 이미 희생제를 미사에서 드린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것을 매우 강조한 그로서는 계속해서 사제라는 용어도 옳지 않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언급해야 하는데 그렇게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는 않은 듯하다.

 

  1. 나가면서

한 사람이 완벽하지 않았기에 여러 개혁자들이 있었고, 이들이 각기 기여를 하여 우리에게 가장 성경적인 교회가 어떤 모습인지를 잘 제시해 준 것이다. 츠빙글리에게서도 배우고 또 다른 개혁자들에게서도 배워서 가장 성경적인 교회를 이 땅에 구현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성경이 그 누구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듯이, 진정한 교회사도 그렇다. 각각의 개혁자들에게서 독특한 점들을 배우고, 그들을 잘 조화시키며 결국은 성경에 비추어 그들의 문제점도 말할 수 있다. 이제 이 시대에 우리는 성경을 잘 배워서 가장 성경에 충실한 교회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스위스에서 이런 일을 제일 처음 시작한 츠빙글리에게서 우리는 다음 같은 점을 잘 배우면서, 우리도 그런 일을 더 성경적으로 하여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1) 자국어 예배의 시도와 관련하여, 우리의 예배가 참으로 신자들이 잘 이해하고, 따라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온전히 성취된 구속 사건과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 구속에 참으로 감사하여 예배 하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미 16세기에 자국어 예배가 시작되어 계속해서 우리도 한국어로 예배하지만,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그 의미에 충실하지 않은 예배라면 그것이 심각한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임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2) 우리도 고대 교회의 그 전통과 종교 개혁의 이 연속적 성경 읽기와 강해 전통을 따라서 성경을 공부하고, 그런 방식을 예배하는 일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두 가지 일이 강하게 요청된다. 하나는 성경 본문 외의 신구약 성경을 매우 상당 부분 연속해서 읽는 순서가 회복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주일 아침 설교에서도 연속적 강해의 방식으로 설교하는 일이 좀 더 적극적으로 시도되고 수용되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연속적 강해는 주일 저녁이나 수요 기도회나, 새벽 기도회에서 설교하는 방식이 되어서 주일 아침 예배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이상한 의식이 형성되었다. 그런 것이 깨어지고 모두가 성경을 중심에 두고 둘러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잘 해석하는 해석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3)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츠빙글리의 구별과 관련하여, 우리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된다고 하면서 성경에 무엇을 더하면서 그것이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생각함이 온전히 제거돼야 한다. 사순절을 지키는 것이나 다른 인간적 규례들을 따르는 것은 결국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철저히 진리의 사람들, 즉 성경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진정한 성경의 사람들은 (a) 성경을 늘 배우려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b) 구체적인 실천에서는 가장 따뜻하고 사랑에 넘치는 사람임을 명심해야 한다. 늘 배우려고 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거짓 종교를 가진 사람들임을 참으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참된 종교로 돌이켜야만 한다.

(4) 취리히 예배당들에서의 상(像) 파괴와 관련해, 우리들도 마음에 있는 거짓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파괴하고 진멸하며, 하나님을 성경을 따라 섬기지 않는 모든 것을 궤멸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러할 때 우리는 개혁파 운동을 최초로 취리히 시에서 일으킨 츠빙글리를 잘 따라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츠빙글리가 말한 참된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방식으로 (삼위일체를 말하고, 십자가와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거짓 종교를 드러내고 있는가? 이것이 이전 시대의 개혁파 선배들이 늘 묻던 질문이기도 하다. “개혁파인가 아닌가?(To be or Not to be Reform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