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위그노 탐방기 _ 김현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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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위그노 탐방기

 

<김현일 목사 _ 증평언약교회>

 

빨리쉬 동상 앞에서 1차 탐방 팀
모(Meaus)교회에서 2차 탐방 팀
에그모뜨흐 신교박물관에 보존된 위그노 예배당
마리 뒤랑이 우물 앞에 새긴 글씨 ‘저항하라’
광야박물관의 휴대용 성경과 시편찬송
<그림> 위그노들의 광야 예배 광경

 

조병수 교수와 함께하는 프랑스 위그노 탐방은 혹독한 고난 가운데서 신학과 신앙을 지켜낸 역사적 현장을 돌아보는 프로그램으로 2019년 4월 21일-27일(1차)과 4월 28일-5월4일(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필자는 1차 탐방에 참여하였다.

어느 목사님은 위그노 탐방을 간다고 하자 ‘여행을 가시느냐’는 반응에 당황하셨다고 했다. 일정표를 보여주자 익숙한 루브르 박물관 탐방을 제외하곤 낯선 지명임을 확인하고서야 그 의미와 가치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우리에겐 생소한 지구 반대편 위그노들의 삶이지만 거기엔 종교개혁의 귀한 유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해

긴 시간 여행 끝에 도착한 곳은 프랑스 남부 해안 항구도시인 마르세유에서 조금 떨어진 이프(Cahteau d’If) 섬이었다. 이 섬은 프랑수와 1세가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해 건설한 난공불락의 요새로서 한때 옛 프랑스 왕족들의 희귀 동물 사육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우리에겐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성 입구에는 [3천 5백명의 신교 신자들을 기념하여]라는 현판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은 신앙을 위하여 정죄를 받아, 1545년부터 1750년까지 마르세유의 갤리선 위에서 노를 저었고, 여러 사람이 생니콜라 요새에 있는 생장 요새와 그 성채에 투옥되었다. 그들은 배교하는 것보다 착고에 채이고 감옥에 갇히며 죽임 당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눈 앞에 펼쳐진 지중해 바다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렸다.

다음 날 새벽 에그모흐뜨(Aigues-Mortes) 성 외곽을 조용히 걸었다. 십자군 원정을 위해 지어졌던 중세 도시이자 튼튼한 요새였으나 성의 가장 높은 뚜르 꽁스땅스 탑은 1692년~1768년까지 위그노들의 감옥이었고, 탈옥수가 생긴 이후로 여자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성 입구에 위그노 십자가, 창살, 겔리선이 새겨진 비석은 이곳이 위그노들의 아픔의 현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에서 위그노 여성인 마리 뒤랑을 만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살해당했고 아버지는 투옥되었으며 광야 설교자였던 오빠 삐에르도 20세 약관의 나이에 총살당했다. 19세에 체포된 그녀는 오빠를 카톨릭으로 회유할 목적으로 투옥되었다. 그녀는 38년 동안 복역하면서 투옥된 위그노 여성들을 영적으로 돕다가 사망했다. 차가운 돌바닥, 틈새로 들어오는 햇볕이 밝음의 전부인 어두컴컴한 공간, 그곳에서 성경말씀으로 다른 여성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특히 감옥 안 돌로 된 우물 테두리에 “저항하라”(REGISTER)라는 글씨를 새겨 넣음으로써 신앙을 철회하라는 압력에 맞서 강력한 저항정신을 불러일으켰다. 1730-1768년까지 뒤랑과 함께 수잔느 바싸는 동료 죄수들을 책임지는 비서 역할을 하면서 30여명과 정기적인 모임을 상시로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매일의 고난을 살아가게 만드는 삶의 중심에 성경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확인하며 탐방자들은 바돌로매 학살 때 순교한 작곡가인 클로드 구디멜(Claude Goudimel)이 작곡한 시편 찬송 1편을 함께 찬송했다.

 

신앙과 예배

구불구불한 시골 길을 달려 앙뒤즈(Anduze)에 있는 광야 박물관(Musee du Desert)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는 식당의 할아버지는 우리가 단체로 찾아 온 최초의 한국인들이라고 했다. 왜 광야 박물관일까? 위그노의 자유를 자세히 기록한 수십 페이지의 낭뜨 칙령은 루이 14세의 종이 한 장짜리 몽텐블로 칙령에 의해 폐기되었다. 이 칙령은 위그노 예배당을 모두 파괴하고 개혁파 설교자는 2주 안에 떠날 것과 위그노 신앙을 철회하면 더 많은 급료와 사회적 보장을 약속했다. 위그노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탈출이나 망명, 순교, 카톨릭으로의 전향, 무력저항, 카톨릭으로 돌아서지만 위그노 신앙을 가지고 사는 이중생활, 마지막으로 광야, 동굴, 무덤과 같은 곳에서 비밀리에 모여 신앙을 유지하는 삶이 그것이다. 그들의 비밀스러운 신앙 생활을 보여주는 곳이 광야 박물관인 것이다. 위그노들은 비밀집회를 위해서 이동식 설교 강대상을 가지고 다녔고, 휴대용 성찬기로 은혜를 나눴다. 눈에 띄는 것은 미니 성경책과 미니 시편 찬송가였다. 작은 사이즈로 만든 이유는 두건 속에 숨기기 쉽고, 발각 되었을 때 휴대하기 편리하도록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 박물관 벽면 한 가득 1684-1775년 갤리선에 끌려간 위그노 목회자와 성도들 5천명의 출신과 명단이 적힌 서류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록되지 않은 인원을 포함하면 2만 명이 훨씬 넘는다고 한다. 당시 위그노 남성들은 처형 아니면 갤리선 복역, 여성들은 투옥, 아이들은 수도원으로 넘겨져 카톨릭 재교육에 처해졌다. 위그노들의 결혼은 불법 동거 취급당했고, 태어난 아이는 사생자 취급을 받았고, 죽어도 교회 묘지에 묻히지 못해 어떤 경우는 도축장에 버려지기도 했다. 그림들 위로 두 개의 성경 구절이 기록되어 있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 성경을 사랑하고 개혁신앙을 가지는 것은 모든 면에서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다(마 10:37-39).

셋째날 우리는 르뽀에라발(Le Poet Laval)에 있는 또 다른 신교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한 때 위그노 예배당이었다(https://www. museeduprotestantismedauphinois.com/). 신앙의 자유가 철회된 후에는 마을 회관으로 사용되다 근대에 와서야 예배당으로 복원되다 인구 감소로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배당은 밝은 빛이 들어오는 큰 창문, 중앙에 있는 성경, 강대상 옆에 있는 1시간짜리 모래시계, 서로 마주 보도록 배열된 좌석, 2층에 여성을 위한 좌석들이 있었다. 모레시계는 시간을 알리는 것과 함께 성경을 1시간 동안 설교할 영적 실력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위그노의 후손인 박물관 직원이 우리의 소속을 묻자 “장로교”라고 대답했다. 그는 ‘우리는 같은 형제’라며 미소 지어 보였다. 관람을 마친 후 밖의 날씨는 비 바람 때문에 우산이 꺾일 정도였다. 위그노들은 이런 날씨 속에서도 모이기를 힘썼을텐데… 카톨릭의 집요한 박해 속에서 안전, 생계, 삶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면서 가족의 손을 이끌고 인적이 드문 산 속으로 걸어갔을 위그노 부모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고난의 길을 기꺼이 걸어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예배당 중심에 있던 성경에 대해 힘있게 설명해주던 위그노 후손의 얘기를 통해 그 대답을 짐작해 본다.

 

깔뱅의 모국, 프랑스는 선교지

파리에 가기 위해 리옹을 들렀다. 개혁자들은 리옹을 제2의 제네바로 만들려고 했을 만큼 개신교 신앙에 빨리 반응한 곳이다. 위그노를 검색해 보면 장 페리상(Jean perrissin)이 위그노 예배 모습을 그린 “천국(낙원) 교회”(Du Paradis)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는 개신교회 흔적은 희미했다. 그런 곳에서 합신 유일의 교회인 그로노블 선한열매교회 정정용 목사 부부를 만났다. 12년째 파리와 그로노블을 오가며 유학생들의 부모 노릇을 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놓고 주의 부르심 앞에 헌신해 동역자를 만나니 너무 기뻤다. 그는 프랑스를 천만 모슬렘의 나라, 인종의 전시장과 같은 곳, 아프리카 선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소개했다. 자신이 사역하는 그로노블은 언어 훈련의 최적의 장소이고, 파리는 선교 훈련의 연습장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깔뱅의 모국 현재의 프랑스는 선교지인 것이다. 이젠 신앙의 역수출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파리 일정의 시작은 파란 대문이었다. 이곳은 최초의 위그노 개혁 총회가 열린 곳이었다(1559년). 프랑스 신교는 1555년에 조직교회가 5곳뿐이었지만 총회가 열리던 해에 100개 교회로 증가했다. 놀랍게도 1562년 1차 종교전쟁 발발시에는 2,150 교회로 부흥했다. 만약 종교전쟁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대부분 신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깔뱅은 제네바 목사회를 통해 1555년부터 1562년 사이에 118명의 선교사를 보냈는데 그 가운데 88명의 선교사를 프랑스에 파송해서 모국의 교회를 섬기도록 했다. 순교를 각오한 섬김이었으리라! 위그노 교회는 박해 중에서도 위그노들은 총회를 열었고 깔뱅이 보내온 신앙고백서를 확대시키고 자신들의 상황에 적응시켜 갈로아(라로셀) 신앙고백서(프랑스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다. 교회정치를 결의하여 목사(예배집례, 설교, 목양), 장로(치리-성도의 도덕유지), 집사(재정과 구휼)의 직분 체계를 세워갔다. 교회 제도 역시 제네바의 영향으로 당회를 구성했고 시찰회와 노회, 총회 제도를 마련했다. “어떤 교회와 직원도 다른 교회와 직원에 대하여 우위권이나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는 자율, 평등, 협력의 원리를 갖춘 교회관을 수립했던 것이다. 평등은 당시의 가톨릭 계급주의와 성속의 분리에서 생기는 차별에 반하는 반계급주의의 표현이었다. 집사들의 구휼과 신앙의 자유는 이후 프랑스 대혁명의 평등, 자유, 박애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위그노 운동은 목회자들 뿐 아니라 여러 평신도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마리 뒤랑, 위그노 운동의 리더였던 콜리니 제독, 뛰어난 의술가 빠레, 베자의 설교를 듣고 깔뱅주의를 받아들여 위그노들의 보호자가 되었던 앙리 4세의 어머니 쟌느 달브레 등. 위그노 운동은 평신도 운동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들의 활약은 뛰어났다.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빨리쒸(Bernard Palissy)이다. 그는 위그노로서 독특한 유약을 사용해서 전원풍의 도자기를 굽는 희대의 도예가였고, 루브르 박물관의 한 공간에 전시될 만큼 영향력 있는 예술가였다. 당시 위그노 박해에 앞장선 까뜨린느 메 디치가 그의 재능을 아껴 바돌로매 학살(1572년) 때 제외시켰을 정도이지만, 온갖 회유에도 불구하고 바스티유 감옥에서 아사했다. 이 사람들은 신앙을 위해서 목숨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소유한 재능, 재산, 모든 안전까지도 기꺼이 포기했던 것이다.

마지막 날 일정은 프랑스 신교 운동의 시작점인 모(Meaux) 신교 교회(1546년 최초로 세워진 위그노교회)였다. 이 교회는 깔뱅이 섬겼던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스 난민 교회를 모델로 하고 있다. 직모업자였던 에띠엔느 멍정의 집에서 삐에르 르끌레르끄가 최초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책임을 진 목사”로 임직되었으나 밀고자들에 의해 62명이 체포를 당하고 14명은 처형을 선고 받고 마을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 그 명단은 입구 뒤편에 있었다. 그 가운데 앙리 위티노와 장 보두앙의 후손들이 지금도 이곳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셨다. 교회의 장로로 섬기는 메땅 장로님의 차분한 설명은 우리나라 믿음의 선배들의 박해 이야기처럼 생생했다. 비록 소수이지만 위그노 신앙을 지켜온 증인들의 고백이 마음 깊숙이 다가온다.

 

한국 교회를 생각하며

같은 방을 사용한 목사님은 아침에 깰 때 마다 위그노를 보면서 ‘한국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쏟아내셨다. 위그노들의 망명을 통해 개혁신앙이 전 유럽에 확산되었는데 그 점에 있어서 우리도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고난의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성경을 읽고 예배하고 모이기에 힘씀으로 신앙을 지켜왔던 위그노들은 위기 속에 한국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귀감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