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종교인들의 “영성” 강조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
는가?
이승구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주제들(전쟁, 핵문
제, 반전, 평화 등) 가운데 하나로 소위 “영성”(spirituality)이라는 주
제가 있다. 이는 이 세상이 세속화되면 될수록 물질적인 것과 그것에 사로잡
힌 우리의 삶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문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일반적인 추
구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불교적인 “영성”, 특히 티베트 불교적인 “영성”이 한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하였고, 베트남 출신의 어떤 스님의 공동체 운동이 추구하는 영
성에 사람들이 마음을 기울여서 어떻게 우리가 “화나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갖기도 하며, 무소유에 대한 소박한 강조와 실천에 마음을
쓰기도 하고, 도교나 선을 하는 이들이나 단과 같은 것과 관련된 영성에도
신경을
쓰며, 특히 서구에서 많이 그러하지만 그 영향하에서 우리나라에서
도 인도와 힌두교적 영성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류시화 시인의 시작과 번역, 작품 활동과 그의 행보가 미치
는 영향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위 “영성 운동”을 시작해 온 천주교회
의 영성 운동과 영성 훈련, 또는 그런 것을 좀더 현대적으로 순화시켜 제시
하고 있는 헨리 나우엔 같은 천주교적 저술가의 주장들에 대해 많은 이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성경을 믿고 그리스도에 의지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간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떤 태도와 반응을 보여야 할 것인
가? 이것이 이 글을 쓰게 된 기본적인 동기이다.
이 세상의 영성 운동들에 대한 기독교적 반응
1. 일단 사람들이 이처럼 세속적인 사회 속에서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것 이
상의 것을 향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 점점 많은 이들은 이 세상의 자연적인 과정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며
모든 것을 그렇게 닫혀진 세계(closed system)의 과정으로 설명하려고 하
는
자연주의적 세계관(naturalism)에 사로 잡혀가고 있을 때에, 물질 문명
속에서 살면서도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것 이상의 것을 추구하여 나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비록 미약하나마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드러나고
있는 흔적을 우리는 이런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은 이 세
상이 제공하는 물질과 경제적인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물질적인 것 이상
의 존재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 자연과 물질만 가지고 있
으면 우리 마음에 있는 큰 공허가 있다는 것을 지시해 주는 일종의 표(sign)
로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세상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인간들의 뿌리깊
은 영적인 것과 영원에 대한 갈망의 몸짓이요 절망의 부르짖음으로서의 의미
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그들 나름의 “영성”에 대한 추구는 진정한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인간들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역기능적 요소도 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이 그들 스스로의 판단으로 성공적인 것이면 더욱더 그러하다. 이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참 하나님과 관련해 있을 때만 우리의 존재가 가장 정상적이고 바른 상태에
있는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에는 우리가 아무리 고도한 영적 발전 상태와
비슷한 것을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진정한 영성”에 이른 것이 아니
다.
따라서 타종교인들이 영성을 강조하고 나온 것은 한편으로는 상당히 갸륵한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그들 자신과 그리스도인들을 속일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정상(頂上)의 영적 상태에 이른 이들을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성경과 기독교적 관점에 근거해서 아주 냉정
하게 말하자면, 그들도 물질 문명 가운데 사로 잡혀 있는 이들과 마찬가지
로 결국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그
렇지 않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결국 바른 영성을 지니고 있지 못한 사람이
다.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적용 받는 중생한 이가 되어
야만 그의 영혼이 바른 상태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의 영
성 주장자들은 참된 영성을 보거
나 찾지 못하고 그저 변죽만 울리는 것이며, 좀더 심각하게 말하자면 참된
영성으로부터 사람들을 오도(誤導)하는 것이다.
3. 그러나 기독교 밖에 있는 이들이 그들 나름의 “영성”을 주장하고 추구하
는 것 앞에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일종의 “도전”도 받아야만 한다. 그리스
도 없이도, 성령님과의 직접적인 연관성 없이도 소위 고도의 “영성”을 말하
며 그 결과로 그들의 윤리적인 수준이 고양되었다면, 그리스도와 성령님과
관련하여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즉 참된 영성을 회복한 그리스도인들은 과
연 얼마나 더(a porteori) 고도한 상태에 있어야 하겠는가? 또한 그 결과
로 그리스도인이 드러내는 윤리적인 수준이 얼마나 고도한 것이어야 하는
가?
우리 자신을 비롯해서 우리 주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께서 약속하시고
성령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며 명하신 그런 수준에 있지 못하다는 현실은 우
리에게 매우 큰 도전이 되는 것이다.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
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은 여기서도 적용
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에 의지하면서, 한순간 한 순간을 성령님
께 의존하여 살아가느냐 하는 것을 판단하는 시금석 가운데 하나는 과연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영적인 사람 수준 이상의 것을 성령님께 의존하여 드러
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진정한 교회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핍박받고 조롱과 멸시도 받지만, 이런 점에서는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
을 듣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작금 한국 교회는 이런 점에서 이 세상의 칭송을 듣기보다는 비난을 더 받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오늘의 한국 교회는 스스로를 깊
이 반성하면서 과연 우리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과연 성령님의 가르치심과 인도를 바르게 따라 가고 있는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과연 철저하게 성령님께 의존해 가는 모습
을 보이고 있는가?
4. 그러나 이 세상의 영성 주장가들과 우리를 비교하다가 우리가 의식하지
도 못하고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이 세상의 영성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으니 매
우 주의해야 한다. 이 세상의 소위 “영성” 주장은 그 나름의
독특한 강조점
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유의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영성” 주장의 영향을 받기 쉽고, 실제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역
사 가운데서 그런 영향들을 많이 받아 왔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역사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성경에 비추어서 우
리 가운데 있는 혼합적이고 잘못된 영성 추구를 근절하도록 해야 한다. 예
를 들어서, 플라톤주의가 영향을 미친 이상한 영성 운동의 하나로 영지주의
사상과 신플라톤주의 영향 아래 있었던 사상 등은 인간의 몸을 무시하면서 몸
을 억압하고 고행주의적인 길로 나아가야 영을 고양시키는 것으로 생각하였
고, 정통 기독교에도 그런 영향을 오랫동안 미쳐 왔다. 이런 영향 아래 있
는 영성 운동은 인간의 몸을 억압하고, 일종의 고행주의적 방법을 제시하는
성향이 있다.
신비주의적 영성 운동가들도 다분히 그런 강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
다. 수도원 운동에서도 때때로 이런 강조점이 영향을 발휘해 왔고, 로마 가
톨릭의 여러 종단들은 그들 나름의 영성 훈련을 강조하는 중에 이런 색채를
띄어 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현대의 영성 운동
과 관계 깊은 이그나티우스
료욜라의 생각에도 녹아 있는 이런 사상에 우리는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소위 기독교 영성 운동 가운데서도 이전에 이런 영성 운동의 영향하
에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인간의 영을 추구하는 것이 몸을 무시하게 하
고, 몸과 관련된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억압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우리도 그
런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보다는 요즈음 간간히 회자(膾炙)되는 “일상 생활의 영성”을 말하
는 이들의 접근과 노력이 성경적 세계관이 훨씬 더 근접하는 것이라고 할만하
다. 물론 이런 것이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성령님께 의존하게 하지 않는다
면 우리를 하향 평균화시켜서 실질적인 기독교적 영성이 드러나게 하지 못하
게 하는 것이 되지만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성 운동 가운데 이런 영육 이원론에 근거하여 몸을 무시하
고 억압하는 요소가 있는 지를, 또한 그것을 버려 버린다고 하면서 실질적으
로 우리를 하나님과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
이 있는지를 잘 살펴야만 한다.
우리의 생각과 삶의 태도와 우리의 운동 가운데 우리가 의식적으
로나 무의식
적으로 이런 잘못된 영육 이원론과 그에 근거한 가르침에서 받아 들여 온 것
이 과연 없는 지를 우리는 철저하게 검토해서 그런 요소들을 불식시키려고 해
야 하며, 또한 단일성을 강조하다가 하나님께 우리를 온전히 드리는 것을 무
시하도록 하는 것이 없는지를 생각하면서 매우 주의해야만 한다.
5. 마지막으로 “영성” 문제와 관련하여 오래 전부터 필자가 주장하던 바를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영성을 추구해 왔
고, 또 추구해 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강조하다가는 기독교가 참으
로 제시하는 참된 영적 생명과 그런 영적 상태를 모호하게 할 위험성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회가 이런 문제를 잘 유의하게 될 때까지는 일단 “영
성”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일종의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를 마구 사용하기 시작하면 참으로 기독교적인 “영성”을 흐리
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쉬운 것이다.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구속에만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서 성령의 인도하심
n을 받아 나가는 그런 진정한 기독교적인 영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모
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인식 위에 바로 서서 그런 성령님을 의존해 가는 생
활을 제대로 잘 감당해 나가기까지는 일단 다른 이들의 영적인 주장과 섞여
서 우리를 모호하게 할 수 있는, 특히 천주교회의 주장과 섞여서 우리를 오
도하기 쉬운 “영성”이라는 말을 당분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결과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의 영성 추구
가 펠라기안적인 자기 주장이나 반(半)-펠라기안적인 신인 협력적인 추구라
는 것을 명확히 의식하게 되면, 그 때에는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서만 베풀
어주시는 구원에 의존해서 이제 모든 것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 나
가는 그런 삶과 그런 상태가 진정한 영성의 표현임을 말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그런 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경각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항상 오해
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영성”이라는 말과 표현들을 사용하지 말고, 우
리만이라도 그리스도에게만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서 성령님을 의존해 살아 나
가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이런 삶을 위해 가지 도움이 될 수 있는 책
을 한 권 추천하면 김홍전,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서울: 도서출판
성약)을 들 수 있다. 부디 우리 모두가 그런 진정한 성령님의 가르치심과 인
도하심에 충실한 삶을 살아 갈 수 있기 바란다.
결론
이 문제를 논의하는 일을 기회로 해서 우리는 참된 기독교적인 영성 개념을
분명히 규정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 영성 운동이나 영성 개념, 더 나아가서
는 로마 가톨릭의 영성 운동이나 영성 개념과도 다른 복음주의적 영성 개념
을 규정해야 하는 것이다. 영성 문제를 고찰하는 이 기회를 빌어서, 참으로
기독교적인 영성 개념의 규정과 실천을 위해 다음의 요청을 하고자 한다.
1. 이제 우리네 한국 교회에서는 ‘영성 훈련’이라는 말을 전혀 사용하지 말
아야 한다. 우리가 위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구속에
만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는 그런 진정한
기독교적인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참된 영성은 훈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잘못된 영향과
문제만을 야기한다. 도대체 영성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의 실태
를 정확히 보라. 성령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이 있을 수는 있으나 인위
적인 훈련은 언제나 잘못된 것이다.
2. 더 나아가서, 다시 한번 더 말하자면,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영성”이라
는 말의 사용에 대해서도 한동안은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는 것이 좋을 것이
다. 그 대신에 우리는 성경 자체와 개혁 신학이 늘 강조해 온 용어인 “경
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라고 말하는(약 1:27)
야고보가 말한 그런 경건이 우리에게서 나타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 전체(the whole counsel of
God)를 잘 파악하고, 그 하나님의 경륜의 빛에서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해 나가시려고 하는 바에 온전히 헌신하도록 하는 일을 성령을 의
존하여 힘써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영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의 경륜
에 무관심한 삶은 전혀 영적인 것이 아니다.
4. 따라서, 개인주의적 신앙에서 벗어나 교회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과 하
나님 나라를 증시(證示)하는 종말론적 공동체로 나타나도록 교회의 지체 의
식에 충실한 신앙 생활에 힘써야 한다. 즉,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공
동체적으로나)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
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런 복잡한 영적 혼란기에 참된 하나님
을 알게 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